여든네 살 엄마에게

엄마, 사랑해

by 도로시



엄마, 지금은 밤 9시가 넘었어. 엄마는 일찍 자리를 펴고 누웠겠네. 글쓰기 숙제로 편지를 써야 해서 누구한테 쓸까 며칠을 고민하다 엄마에게 써. 오늘 밤 엄마는 어느 시간 속을 헤매고 있을까? 오늘 낮에 공부방 벽시계가 5분씩 늦게 시간을 가리키기에 새 건전지를 넣었더니 멀쩡하게 시간이 맞춰지네. 시계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엄마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던 그때 우리가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엄마의 시간은 제대로 흘러가고 있을까?


작년에 한 달을 입원하고 퇴원한 후로 오래된 기억 저편의 이야기를 현재인 것처럼 생생하게 말하곤 해서 아빠를 놀라게 만들었잖아. 급하게 담당교수님께 전화했더니 파킨슨 환자에게서 보이는 섬망증세라고 하더라. 엄마의 기억이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엄마가 스스로 느끼기 전에는 아니라고 부정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때부터 엄마는 외할머니가 없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주 했어. 이모가 여덟 살, 엄마가 열두 살이었을 때 외할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냈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한창 엄마 손이 필요한 시기에 엄마 곁에 ‘엄마’가 없었던 거잖아.


어렸을 때 엄마는 왜 우리 4남매보다 이모를 더 챙길까? 이모는 왜 우리 집에 오면 마치 친정에 온 듯 행동할까? 불만이 많았는데 엄마가 아프고 나서야 그 옛날이야기를 알게 되었어.


작년 엄마 생일 때 뭐가 먹고 싶으냐는 물음에 엄마는 한참 생각하더니 “우리 엄마가 보고 싶다. 먹고 싶은 건 없고 우리 엄마는 그 더운 여름에 나를 낳고 얼마나 힘들었을꼬? 우리 엄마 딱 한 번만 보고 싶다.”하는데 가슴이 저릿하더라. 내가 놀리듯이 엄마한테 되물었잖아. 엄마는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엄마가 보고 싶으냐고. 엄마가 그때 목멘 소리로 그랬어. “엄마는 언제나 보고 싶지.” 그 말을 듣는데 할 수만 있다면 엄마의 시간을 되돌려주고 싶더라.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서 외할머니가 계시던 시간으로 돌아갔다가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하고 그 품에 안겨서 힘들었던 일 서러웠던 일 실컷 말하고 오게.


엄마, 그런데 그거 알아? 나도 순간순간 엄마가 보고 싶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1시간 거리에 엄마가 있지만 엄마가 보고 싶을 때가 많아. 아픈 오빠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내 안에 아직 어린아이가 있어 힘든 순간이 오면 엄마 생각이 먼저 나.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니 엄마는 첫아이를 낳았을 때도 몸조리해 줄 친정엄마가 없어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생각이 들더라. 엄마는 그때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딸들 애 낳을 때 미역국은 꼭 끓여줄 수 있게 오래오래 살 거라고 마음먹었다고 했잖아. 외할머니가 고작 마흔일곱에 돌아가셨다면서.


엄마가 오래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낳을 때마다 소고기 미역국보다 맛있는 생선미역국을 끓여줘서 감사해. 나한테는 없었던 친절한 외할머니로 우리 딸들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엄마, 내가 요즘 주 1회 심리 상담을 받고 있어. 엄마가 걱정할까 봐 말 못 했는데 아직도 나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우울해.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나에게 꼭 맞는 말을 발견했어.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도덕경에 나오는 말 이래. 내가 이 지긋지긋한 우울에서 벗어나려면 내 안에 남아있는 일곱 살, 열 살, 열두 살, 열다섯 살의 나를 찾아가 힘들었던 나를 꼬옥 안아주고 이제 괜찮다고 다독여야 한대. 그래서 노력하고 있어. 매일 그때의 나에게 '잘 견뎌주어 고맙다.' '기특하다' 말해주면서.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그때의 엄마에게도 말해주고 싶어. 서른아홉 살, 마흔두 살, 마흔네 살 , 마흔일곱 살의 엄마……. 잘 살아내줘서 고마워. 감사해.



엄마, 지난 추석 때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 기억해?


“추석에 와줘서 고마워. 사랑해.”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생각지도 않은 전화통화에서 듣고는 덜컥 겁이 났어. 평소에 절대로 안 해주던 그 말을 나한테 해주니까. 엄마가 더 많이 아픈가 걱정이 되었어. 00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으로 힘들 때 내가 엄마에게 부탁했잖아. 매일 저녁 나한테 전화를 해서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그러면 내가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고. 그런데 엄마는 그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애들이나 잘 챙기라고 했지. 그때는 ‘사랑해’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말이냐고 섭섭해서 한 달이나 전화를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나. 이제 내가 매일 저녁 전화해서 그 말해줄게. ‘엄마 사랑해’


여든네 살 우리 엄마, 우리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순 없지만 오늘부터 우리 1일 하자. 매일 사랑한다고 애썼다고 서로에게 말해주자. 이제부터 지나간 시간에 얽매이기보다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살기로 해. 내일 전화할게. 잘 자, 엄마.




매일 엄마가 그리운 큰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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