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과 섬세함의 차이
2월에서 3월에는 출판사에서 인세 보고를 한다. 전업으로 그림책만 그리는 나로서는 소중하고 간절하며 절실하다. 『목욕 중』은 선인세(계약할 때 미리 받는 인세)를 300만 원 받았는데 받을 인세가 -125만 원이다. 출판사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케이크를 먹는 나라』는 140만 원을 선인세로 받았는데 -49만 원이다. 『공룡은 딸기를 좋아해』는 선인세를 받지 못했고 +70만 원이다. 같은 출판사여서 미안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둘 합치면 수익이 났으니까.
문제는 나다. 씨드북 출판사에서 받을 인세가 없고 걸음동무 출판사에서 인세를 받아도 19만 원이잖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아냐, 아냐. 새로운 그림책을 계약하면 선인세를 주잖아? 많이 그려보자. 계약될 거야. 모두 잘될 거야. 잘 되겠지?
2021년에『날개』 『제목 미정』 『똥 사탕』 『ㄱㄴㄷ』을 그렸고 『똥 사탕』 한 권만 계약됐다. 일 년 동안 번 돈이 씨드북 출판사에서 선인세로 받은 200만 원이 전부다. 하지만 『똥 사탕』은 내 인생 최고의 그림책이니까 지금 힘들더라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잘 되겠지? 아직 8월이잖아?
『똥 사탕』은 사향고양이에게 커피만 먹여가며 학대해서 얻은 '루왁 커피'에서 영감받아 만든 이야기다. 또한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인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받는 세 가지 방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희망을 키워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커진다. 늘어만 가는 대출, 현금서비스 돌려 막기로 살아가는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카락이 심하게 빠진다. 가족력에 대머리가 없고 정수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빡빡한 머리숱이었다. 허리도 너무 아프다. 다시 서서 그리자. 구미에서처럼. 초심으로 돌아가자.
새로운 아이디가 좋다. 아직 9월이잖아. 괜찮아! 매일 14시간씩 그리자. 자는 시간 빼고 그림만 그리자. 분명히 잘될 거야. 크리스마스에도, 새해에도, 밥을 먹으면서조차 그린다. 9월부터 7개월 동안 미친 듯이 서서 그린다. 서서 그렸더니 무릎이 바스러질 것처럼 아프다. 너무 몰입해서일까?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투고한 원고는 모든 출판사에서 반려됐다.
매달 한 번씩 만나서 술을 사주시는 선생님이 계신다. 그림책을 너무 사랑해서 그림책 독서회를 운영하는 분이시다. 도서관이란 곳을 처음 갔을 때 그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그림책을 출판사와 계약했는데 모르는 게 많다고 하자 관련 책을 추천해 주셔서 도움이 많이 됐다. 투고한 원고가 반려되어 힘들어하던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선생님과 술을 마시다 말했다. 책이 너무 안 팔려서 고민이라고. 『목욕 중』이 인기가 없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목욕 중』이 별로 재미없다고 하신다. 잘 안 팔리는 게 당연하다고 하신다.
내게 어떤 의미의 그림책인지 아시면서. 그래도. 뭐, 그럴 수 있다. 개인 취향이니까.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내가 나를 비웃는다.
다음 날 오전 8시. 외출복 그대로 잠들어 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잤나? '삐'하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린다. 냉장고 문이 닫힌 걸 보니 보일러 소리일까? 확인해 보니 온수 모드만 켜져 있다. 이런! 내 귀에서 나는 소리잖아? '삐'하고 또 '삐'하고 계속 '삐' 한다.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다. 아침은 물론 점심, 저녁을 굶고 다음 날도 먹을 수가 없다.
삼 일이 지나도 먹고 싶은 게 없다. 마트라도 가면 생각이 바뀔까? 시끄럽고 빠른 음악 소리, 장 보는 사람들 말소리 그리고 '삐'하는 소리가 뒤섞여 정신이 하나도 없다. 며칠 굶었더니 마트 바닥이 평평하지 않다. 사선으로 기울어져 보인다. 어머니 전화가 온다. 받을 자신이 없다. 텅 빈 위가 쓰리다. 통화 거절하려고 아무 버튼이나 누르자, 통화가 연결돼 버린다.
넌 내가 원고 준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도대체 뭘 하고….
순간 마트에 물이 쏟아진다. 발목부터가 아니다. 가슴부터 물이 차오르더니 순식간에 천정까지 물이 가득 찬다. 시끄럽던 소리가 조용하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숨도 쉬어지지 않는다. 붉어진 얼굴은 금세 핼쑥해지고 동공이 확장된다. 이런 게 공황장애일까?
예민함과 섬세함의 차이가 있다. 섬세함은 같은 것이라도 다정하게 보는 시선이다. 타인에게 말과 행동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있다. 반면 예민함은 신경질적이다. 내 생각의 기준과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비판한다. 검색을 해보니 예민함은 외부 자극에 과민하게 반응해 스트레스 또는 갈등을 유발하기 쉬운 자기중심적 민감함이라고 한다. 반면에 섬세함은 타인과 환경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이타적 민감함이라고 한다.
그 선생님의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해서 예민해질 필요가 있을까? 내가 선택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세상을 좀 더 밝게 비추는 섬세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