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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전 Nov 16. 2021

해외 멘토링을 가다.

교대에 들어간지 1년 나는 색다른 것을 찾고 싶었다.학교 홈페이지를 기웃 거리다가 나는 해외 멘토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을 알았다. 대학에서 비행기 값을 지원해주고 해외 학교에 가서 교육 봉사를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해외로 가는 프로그램이라는데 눈길이 갔다. 그것도 그냥 여행도 아닌 내가 수업을 하고 봉사도 할수 있는 프로그램이지 않은가. 뭔가 보람찰 것 같았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  바로 신청했고 운좋게도 중국 상해 한국인 학교에 교육 봉사를 떠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해외로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교수님들과 몇몇 지원자들과 함께 상하이로 떠났다.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모두 사진처럼 선명하지는 않다. 그 당시 찍었던 사진들은 모두 잃어 버렸고 나는 그 기억을 오직 내 머릿속, 내 가슴 속 어딘가에만 담아두고 있다. 내가 떠난 당시는 2007년의 겨울이었다. 중국의 날씨는 우리나라의 기후와 비슷했다. 나는 겨울 옷을 주섬주섬 입고  떠났던 것이 기억난다. 처음 타는 비행기의 느낌 등이 생생히 기억난다. 갑자기 속력을 높이며 떠오르는 비행기를 신기해 했었다. 그리고 도착한 상해는 나에게는 처음으로 가는 해외였기에 새롭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일주일동안의 짧으면 짧고 길면 길수도 있는 교육 봉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교육 봉사는 3~4일 정도였고 남은 2일정도는 상해 주변을 둘러보는 여행이 포함된 프로그램이었다.     


 그 당시 국어 수업, 미술 수업, 체육 수업 등 주로 낱말맞추기나 꼬리 잡기와 같은 놀이를 이용하여 수업했던 것이 기억난다. 교사생활 경험이 있는 지금에야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수 있지만 그당시에 나는 잘 하지 못해 같이 떠난 선배들의 수업을 지켜봐야 했다.


 나의 수업을 기다리며 미리 아침에 도착한 아이가 있었다. 그래도 나를 좋아해주는 학생이 있구나 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때 나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었는데 그게 이천수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던지 아이들은 같이 축구를 하면서 나를 이천수라고 불러주었다. 그 당시 만났던 많은 아이들도 기억에 남는다. 학생으로 아직 부족한 수업에도 손을 들고 참여했던 아이들이 예쁘게 보였다. 먼 한국땅을 떠나 상해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그들에게는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일주일정도 머물면서 맛있는 것은 정말 많이 먹었다. 중국 음식이었지만 한국인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라서 부담없이 많이 즐길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핸드폰의 카메라도 좋지 않았기에 디지털 카메라로 정신없이 음식들을 찍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억에 남은 음식은 동파육인데 쫄깃하고 달콤했던 맛이었다.또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중국 관광을 했던 것이다. 상해는 매우 발달해 서울 못지 않게 발전해 있었다. 중국이 다시 강대국이 되었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상해 타워에서 바라본 중국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행 도중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한 시장에서는 혼자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일행을 잃어 버릴 뻔 했고, 중국 기후가 맞지 않았는지 몸에서 열이나 머리에 온통 열꽃이 피기도 했다.     


 하지만 일주일의 봉사활동이 끝난 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멘토링을 통해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가르쳐보기도 했으며, 여행도 했으며 같은 지원자들과 우정을 나눌수도 있었다. 그래서 였던지 나의 마음의 키가 한 뼘은 더 성장했음을 느꼈다. 15년이 넘는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의 순간 순간이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누구나 저마다의 추억의 사진 한 조각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추억의 한 조각은 상해 학교에서의 교육 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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