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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전 Nov 23. 2021

선생. 사회 복무요원되다.

선생. 사회 복무요원되다.     


1년 6개월간의 짧은 학교 생활을 마치고 나는 군대에 가게 되었다. 다행히 사회복무 요원을 하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힘들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 흔히 생각하는 자리만 차지하고 게임하는 사회 복무요원을 떠올렸던 것이다. 몇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나는 지역의 한 구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일은 구청안에서 근무하는게 아니었다. 공원 컨테이너 박스에서 지내며 각종 공원 관리 일을 하는게 내가 맡은 임무였다.


 학교에서 넓은 교실을 차지하고 지내던 나였기에 자리도 없이 컨테이너 박스에 쭈그려 앉아 있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사회 복무요원이 된 것을 후회했다. 공원에는 각종 잡일이 많았다. 공원 청소는 기본이었고, 부레 옥잠 제거 작업, 갈대 제거작업,벽돌을 나르는 빈 식물원 철거 작업, 나무 심기, 삽질 작업, 부유물 제거, 장미원 관리, 비료뿌리기, 장미 전지 작업 등 각종 일을 맡아서 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작업은 일단은 쓰레기 청소였다. 나는 서구의 4개의 공원의 쓰레기 청소를 매일 했다. 승차감이 안 좋다 못해 어지럼증이 나는 트럭을 타고 네 개의 공원을 돌며 쓰레기를 주웠다. 쓰레기에는 구더기가 있기도 했으며 각종 술병과 닭 뼈가 잔뜩 담겨 있기도 했다. 주말에는 한 공원에서 쓰레기 봉투가 약 20개 정도가 나오는데 그걸 다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쓰레기를 봉투에 담고 나르고 또 날랐다. 그렇게 오전 일이 끝나면 컨테이너 박스에서 쉬는 것이 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적은 월급이었다. 교사 생활에 200여만원을 받다가 사회 복무요원을 하면서 밥값을 포함해 30여만원도 받지 못했다. 애초에 사회복무요원을 먼저 했더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미 교사월급에 익숙해진 터라 나로서는 괴로웠다. 그렇다고 따로 넉넉한 비상금이 있는 통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내 통장의 잔고는 0~30만원을 오갔다.


 게다가 구청의 근무는 6시까지였다. 학교에서는 5시 퇴근이었는데 학교보다도 더 일을 하면서도 월급은 거의 받지 못한 것이다. 물론 현역병들에 비해 쉬운 업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공원 관리업무는 현역은 하지 못하는 그런 힘든 업무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괴로웠다.


 가을쯤에는 공원의 벤치를 도색하는 작업을 했는데 4개의 공원의 벤치를 꼬박 다 페인트로 칠했다. 약간 뿌듯하긴 했지만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봄쯤에는 장미 전지 작업을 했는데 가시에 찔려가며 하루 종일 장미의 가시를 잘랐다. 나는 그때 노동의 가치를 알았다. 또 하루는 빈 식물원 철거 작업을 하면서 벽돌을 날랐는데 허리를 다쳐 집에서 응급실에 간적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모두 헛된 것은 아니었다. 쉬는 틈틈이 여러 책을 읽었고, 많은 일들을 하면서 일당으로 뛰는 노동자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사회 복무요원 전에는 선생님일도 끙끙대며 했는데 사회 복무 요원을 하고 나서는 학교일이 힘겹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하고 있다.


 나에게는 힘든 사회 복무요원 시간이었지만 그 일을 하면서 일의 힘듦에 대해 배웠고 내가 정한 교사 일에 더 집중해서 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군대에서 굴러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 있는데 내게 맞는 표현 같다. 군대를 가기 전에는 학교를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내가 얼마나 배부른 투정을 했는지를 절실히 느꼈다.


 요즘에는 군대의 개월수도 줄고 월급도 늘었다고 한다. 젊은 층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내가 힘듦을 겪었기에 20대 초반의 젋은이들이 고생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사는 파주에는 군대에서 휴가 나온 군인들이 많은데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고생이기에 현명하게 군대의 시기를 보내고 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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