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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전 Nov 26. 2021

기간제 교사 되다

2012년도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나는 할 일이 없어 집에서 쉬고 있었다. 발령이 날떄까지는 최소 6개월은 지나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게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기간제를 하기로 했다. 집근처 학교에 이력서를 돌리고 나서 두군데 모두 연락이 왔고 두군데 모두 합격을 했다. 아무래도 시험 합격자를 우선으로 뽑다보니 내가 선택 된 것 같았다. 나는 원어민과 같이 가르치는 영어 수업에 자신이 없어 영어 전담을 포기하고 사회전담을 하는 한 초등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초등학교는 내가 어렸을 때 다니던 학교였는데 15년만에 다시 그학교를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긴장으로 떨면서 한 첫수업이 끝나고 나는 학교에 적응해 갔다. 수업을 하면서 오후에는 여러 가지 잡일을 해야 했다. 처음 한 수업은 힘들어서 밥을 먹고 점심시간에는 졸기도 많이 졸았다. 하지만 워낙 급식이 잘나왔고, 같이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이 기간제라서 차별하지 않고 정교사처럼 잘 대해주셔서 감사하게도 잘 근무할수 있었다. 내가 맡은 학년은 6학년이라서 워낙 떠들고 장난이 많았다. 내 6학년 시절을 생각하니 이해도 되었다. 최고 학년으로서의 자부심과, 이제 선생님말보다 내마음대로 할거다라는 6학년 아이들을 다루기란 쉽지 않았다. 


 한편 나는 기간제를 하면서 수영을 다녔다. 기간제 일로 바쁘면서도 퇴근후 꼬박 일주일에 3번 수영을 했다. 호흡부터 시작해서 접영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6개월 정도 수영을 다니니 적어도 맥주병 신세는 면했다 싶었다. 26살까지 수영을 못한다는 게 조금은 창피한 일이었는데 이제 다른 사람에게 수영을 할수 있다고 말할수 있고 수영장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에서 수영장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사람이 되었다는게 기뻤다. 


기간제를 하면서 좋았던 것은 바로 월급이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월급은 그 액수도 나에게 컸을 뿐만 아니라 뿌듯한 감정을 선사하였다. 나는 첫월급으로 플레이스테이션을 샀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자동차 게임을 하면서 자동차를 몰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돈은 벌수록 더 벌고 싶다더니 돈을 벌고나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집에서 근무하고 따로 돈이 나가는 곳이 없어서 세달 동안의 월급을 고스란히 모을수 있었다. 그 비용은 그후 방학 기간에 내일로 기차 여행을 하는데 쓰여졌다. 


 기간제를 하면서 맨 처음에 학생 이름 300여명의 이름을 다 외웠다. 전에 기간제 하던 선생님이 강조하셔서 이름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6학년은 기간제 때 전담만 해보고 담임을 맡아본 적이 없다. 만약 6학년을 맡으면 힘들 것이 걱정되기도 하고, 아이를 졸업시켜 중학교에 올려 보낸다는 뿌듯함이 공존할 것 같다. 


 사실 발령 이전의 시간 동안 알바를 하려고 했다.아무 래도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베스킨 라빈스, 카페 베네등 여러 가지 알바에 탈락하고 선택한 게 기간제였다. 결국 나는 학교에서 근무할 운명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기간제를 하면서 배구도 처음 접했다. 그리고 첫날 운동회여서 만국기를 달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이 반 뒤쪽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같이 기간제를 하던 남자 선생님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밥을 사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던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전담실을 같이 썼던 전담 선생님들도 기억에 남는다. 교감선생님과 교장 선생님도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처음이었기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이다. 학교 일이라는 것도 역시 사람이 하는 것이며 남는 것은 사람들과의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정식 발령을 받고는 또 다른 생활을 했던 나이지만 기간제 때의 경험은 내 기억 속에 강하게 있다. 어쩌면 기간제를 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던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기간제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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