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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 R Aug 02. 2022

친정과 거리두기

 벌써 3주 전인가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나, 스스로에 대해 새로운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이었다.

지금까지 우울감과 분노, 상대적 박탈감까지... 재택근무 중인데 일이 손에 잘 안 잡힐 정도로 마음이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정리가 전혀 안된 채 흙탕물로 뒤섞인 마음속 토사물을 날것 그대로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편도 아이들도 잠든 머리맡 위로 번개가 연신 번쩍거려 잠이 깼다. 너무 일찍 일어나면 하루 종일 피곤하기 때문에 다시 잠을 청하려 애써봤지만 실패했다. 결국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외롭고 마음이 힘든 나를 위해서라도...


 생리 직전인 데다 주말이라 두 아들의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체력적으로 힘든 날이었다. 너무 졸리고 피곤한데 친정이라 엄마 침대에 겨우 기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태권도 수영, 교회 여름 성경학교 까지... 그리고 2호가 보고 싶다는 이모의 전화에 판교에 있는 교회에 갔다가 겨우 강남 친정에 들려 내려주고 또다시 2호를 픽업하러 간 날이었다.  

셋째는 분가해서 집에 없었고 남동생과 둘째가 엄마 방에서 한 공간에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엄마는 '아프지 않고 너희에게 돈 달라 부담 주지 않는 부모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이 나이까지 일하러 다니는 것 정말 슬프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갑자기 한 문장을 덧붙였다.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침대에 겨우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도 엄마의 그 문장이 점점 내 정신을 깨웠다.

 "너는 앞으로 받을 생각 말고, 엄마 아빠 강남 살면 든든하잖아 그것으로 만족해"

갑작스러웠다. 분명 유산에 대한 언급 같은데... 굉장히 캐주얼한 상황에서 동생들이 다 있는 곳에서 일부러 반박하기 어렵게 은근슬쩍 얘기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의도가 괘씸했다. 이런 말을 감당해야 할 내 마음에 대한 배려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내뱉었다는 것에 점점 화가 치밀었다. 돈에 대한 의견을 말해야 했기에 아직 미혼인 동생들이 듣는 앞에서 노골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주말 저녁 모두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 장소, 그 시간에 언급을 피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들었냈다는 것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편이 운전을 해서 집에 돌아오는데 차에 타자마자 물먹은 솜처럼 잠이 들어서도 그 문장이 내 정신을 깨웠다.

결국 침대에 눕기 직전, 이  머릿속을 맴도는 엄마의 문장에 대해 정확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힘을 짜내고 짜내 개인 톡을 보냈다.  

"너는 앞으로 받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말... 그거 무슨 뜻이야?"

10여 분 뒤 톡이 하나 도착했다.

 "너 기가 찬다"

나의 반발은... 생각조차 안 해봤던 것일까. 기가 찬다 한마디로 일갈되는구나...

나는 이걸 힘주어 꾹꾹 눌러쓰는 순간에도 돈 앞에서 내 욕망, 분노에 놀라고 죄책감을 느꼈는데...

그리고, 뭘 그동안 해줬다고 "앞으로"라는 단어를 쓴 것인가! 그 단어는 3 주내 내 나를 계속 괴롭혔다.

그다음 날 아침 가족 톡방에 아빠의 톡이 길게 이어졌다. '난 참 불쌍하다"라는 카톡을 엄마에게 마지막 톡으로 보냈었는데 어제 보낸 카톡을 아빠와 싹 나누었나 보다. 이 유산에 대한 언급은 이미 아빠와 얘기가 되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 화가 치밀었다.

아빠는 내 분노를 회피했다, '왜 네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네 마음에 대해 찬찬히 감찰해보렴'이라고 도덕교과서 같은 얘기를 늘어놓으셨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도 않고 괜한 분노를 표출해 동생들에게 까지 이 기분을 전파하고 싶지 않아 가족 채팅창을 나와버렸다.  


 결혼할 때 친정으로부터 돈 한 푼을 지원 못 받았다. 친구들이 직접 준 축의금 외에 공식적으로 받은 것들은 자기들이 다 챙겨갔다.

1000명에게 청첩장을 보내고 500인분을 준비하라고 큰소리 떵떵 치시더니 결혼 1주 전에 갑자기 축소하라고 해서 150인분을 날렸는데..

아직도 네 결혼식은 마이너스였다고 명절마다 한탄했던 친정아빠는 3년이 흘러서야 그 말을 그쳤다.

그래서 외국인인 남편이 살던 5평 오피스텔에서 신혼살림이 시작됐다. 엄마 아빠를 찾아뵐 때마다 당시 사업을 준비 중으로 무직이었던 남편을 욕하고 그런 남편을 고른 내 안목을 욕했다. 그런 집은 마음이 아파 볼 수가 없다며 방문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무시와 비교는 내 안에 켜켜이 쌓여갔고 친정에 많이 엮여있던 나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나는 1호가 태어나기까지 치열하고 비열하게 싸워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린 서로의 바닥을 봤고 나도 나의 민낯을 마주했다. 부끄러웠지만 인생에 꼭 한번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었다.

그러는 동안 준비 없이 찾아온 첫아이를 #자궁외 임신으로 잃었고 감사하게도 시댁의 도움을 받아 신혼살림 6개월 만에 평촌에 17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했다. 오피스텔에서 아파트로 이사하는 날 5평이라 이삿짐센터를 부르기도 민망해 직접 차로 옮기려는데 15년 된 소렌토를 부모님은 빌려주시지 않았다. 귀한 차를 이삿짐 옮기는데 썼다가 누구에게 보상을 받겠냐는 논리였다. 쏘카로 경차를 빌려 새벽에 왕복으로 5번을 내달려 겨우 옮겼다.

돈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15년 된 차를 아끼는 부모님의 모습에 서운했다.

돈도, 차에 흠집이 날까 오래된 차도 아끼면서 정서적 지원을 해주지 않는 부모님의 모습에 정말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1년이 흘러 첫아이가 태어났다. 이 관계를 그대로 깰 수 없었고 난 뭐라도 해야만 했다.

평촌에서 여의도까지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약 6개월 동안 상담을 다녔다. 부부상담까지 약 20회기 정도를 받았다. 자가용이 없었고 장롱면허라 운전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때는 감사하게도 광역버스 타고 친정이 있는 송파에 가면  친정엄마가 여의도까지 데리고 가 상담받는 동안 아이를 봐주셨다. 상담 선생님은 그 손이 많이 가는 젖먹이를 키우는 나에게 친정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라고 처방하셨다.

선생님은 싱글이셨는데 참 쉽게 말하는구나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맞는 처방이었다.

 

 엄마에게 배운 대로, 피해의식에 절어 남편을 원망하고 무시했는데 상담을 받으면서 외국인으로서 남편이 얼마나 날 감당하기 힘들었을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2호를 낳고는 서로의 집에 숟가락 젓가락이 몇쌍있는지 까지 다 안다는 W 교회에 출석했다.

처음에는 남편을 시원하게 고발하고자 간 것인데 이미 성년이 된 자녀를 둔 선배님들로부터 또래들로부터 조언을 들으며 남편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점점 반성하고 부부간의 대화에 하나씩 적용하기 시작했다.  


 14년에 결혼을 했으니 올해로 9년 차다. 돌이켜보면 겨우 대기업 다닌다는 것만으로 허세에 찌들었던 이런 하자 많은 나와 결혼해준 남편에게 한없이 고맙다. 남편이 없었으면 결혼하고 아무것도 가져올 것이 없는 나와 누가 결혼해줬을 까?

마흔이 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사랑스러운 1호, 2호가 있을 수 있었을까?

죽기 전에 나는 나의 민낯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상담은 사치스러운 것이라고만 여겼는데 과연 싱글인 내가 시간과 돈을 들여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나 있었을까?


 무엇보다 15년 된 소렌토도 아끼는 꽉 막힌 친정부 모만 보던 내게 도움이 필요할 때 진짜 필요한 돈을 보내주는 든든한 시댁이 생겼다.

남편이 전세가 아닌 아파트를 매매하자고 했을 때 의아해서 '아니 대체 무슨 돈으로 계약하게?'라고 물었다. 시댁에서 돈을 보태주신다고 약속했으니 믿고 기다리자고 했다. 몇 주 뒤가 계약일이었는데 늘 중요한 순간에 여쭤보면 돈이 없다고 하는 친정에 이미 기대를 다 접었던 터라 100만 원의 계약금을 날릴까 봐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부모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날 이후로도 남편에게 한 약속은 다 지켜주셨다. 그분들의 배려로 우린 어려웠지만 딱 알맞은 시기에 내 집 마련을 했다.  


 시댁은 해외에 있어 1년에 한 번 뵙기가 어렵고, 최근 3년 동안은 코로나로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남편이 도움을 청하면 중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셨다. 내 친부모가 아니지만 부모의 그늘이란 건 이런 거구 나하는 따스함을 그들을 통해 느꼈다. 남편이 몹시 부러웠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와 한국에서 두 번 결혼을 해야 했는데 한국에선 엄마 아빠가 장녀고 개혼이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셔서 한국에서도 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시부모님이 다 비용을 대셨고, 한국은 나 혼자 고군분투하며 준비를 했다.

돈이 모자라면 남편이 돈을 보태줬다. 엄마 아빠는 필요한 자리에 등장만 하셔서 앉으셨다. 직장인인 내가 혼자 다 해결하는 게 당연하고, 결혼 준비 자금에 허덕여 힘든 것은 직장 생활하는 동안 부모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여행 다니고 월급을 몽땅 바치지 않아 생긴 결론이라고 하셨다.

    

그냥 아무것도 안 받고 물러서기엔 엄마가 그동안 장녀라는 미명 하에 부담을 지워준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삼성 다니는 데 월급을 몽땅 내놔 빌라 투자에 도움을 준 이웃집 아들, 무용과 졸업해서 동네 강사로 일하는데 벤츠모는 서울대 노무사와 결혼한 엄친딸과의 비교는 수도 없었다.

  

이번 주 들어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구글 검색 창에 "친정엄마 유류분 청구소송"이라고 검색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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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위로가 됐다. 나처럼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친정엄마와 소송까지 생각 중인 사람이 꽤 많구나 하는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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