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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졌다.

회복을 기다리며

by 마더 R

아버지는 4남매를 기르는 외벌이 공무원이셨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리 집이 넉넉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년에 한 번, 이삿날 시켜 먹던 중국 음식이 우리가 손꼽아 기다리던 유일한 외식이었다.

부모님께서는 그 와중에도 여름휴가는 꼭 챙기셨다.

바다로, 산으로, 들로.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한 손에 운전대를 잡고 한 손에 펼쳐든 전국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도착한 곳이 곧 휴가지였다.

이상하게도 우리가 떠나는 날이면 늘 비바람이 불었고, 어김없이 장마가 시작됐었다.

직장인이 되어 알게 되었다. 좋은 휴가 날짜는 동료에게 양보하고, 남은 날들 중 하루이틀 연차를 내 여행을 가서 그랬던 것이다.

그마저도 아껴 써서 연말에는 연차수당을 꼭 챙기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독하게 절약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늘 퇴직하면 어머니와 유럽여행을 가겠노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퇴직 후 집에만 계시는 것을 불안해하셨고, 어머니와 다투는 날이 잦아졌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가족들조차 아버지와 마주하는 일이 불편해졌다.

아버지는 성실한 공직생활 끝에, 일반인은 갖기 힘든 자격증을 하나 갖고 계셨다.

아마 기능사, 기사까지 포함하면 열한 개쯤 될 것이다.

그 덕에 사외이사로도 일하셨고, 아파트 전기기술자로도 겸직할 수 있었다.

환갑을 넘겨서도 대기업에 다니는 나와 연봉이 맞먹거나, 더 벌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 대가로 젊은 사람도 버티기 힘든 24시간 교대근무를 견디셔야만 했다.

아버지께서 공무원 퇴직을 몇 해 앞두었을 무렵, 함께 아시아 몇몇 도시를 여행했던 적이 있다.

비즈니스석도 아니었고, 호화로운 일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아이처럼 웃으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 아빠도 나처럼 여행을 좋아하시는구나. 어쩌면 난 아빠를 닮은 걸지도.’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였을까.

교대근무를 마친 다음날 초라한 반찬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게 될 때면

몰래 화장실로 가서 눈물을 훔쳤다.

그는 공무원 시절과 다름없이 묵묵히 24시간 교대근무를 수행했다.

아파트 전기기사로 일하신 이래로 아버지는 해외여행 단한번도 가지 못하셨다.

국내여행도 늘 당일치기가 전부였다.

그 모습이 내 눈에는 마치 전자발찌를 찬 죄수 같았다.
자유를 빼앗긴 채 묶여 있는 듯한, 그 무게가 가슴 한켠을 아리게 했다.


2년 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과목을 담당했던 담임 선생님을 친구들과 함께 찾아뵈었다.

여전히 부천에 살고 계셨고, “나 부자처럼 산다”며 껄껄 웃으셨다.

사학연금 덕분에 1년에 두 번쯤 여행을 다니고, 주말에는 손주 재롱을 보는 재미로 산다고 하셨다.

그 순간, 교대근무 중이실 아버지의 얼굴이 겹쳤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눈에 뭐가 들어간 척하며 얼른 닦았다.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모르셨던 아버지.

여전히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계셨다.

그럴 때면 용기를 내어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이제 그 무거운 짐 좀 내려놓으세요. 연금 받으시며 조금은 즐기면서 사세요.”

그러면 언제나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잘 모르는 소리 말아라.”

아버지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둘째와 넷째를 늘 마음에 두고 계신 듯했다.

“평생 공무원으로 살다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건 정말 비참하다.”

그 말도 자주 하셨다.

올해 들어 아버지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냉장고 문 앞에는, 아버지를 힘들게 한다는 동료들의 이름이 여전히 적혀 있다.

가끔 친정에 들르면, 그 이름들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 번은 어머니께 물었다.

“누가 아빠를 저렇게까지 몰아세우는 거예요?”

어머니는 담담하게 대답하셨다.

“아버지 선택이지, 누구 탓도 아니다.”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무엇이 아버지를 그렇게 괴물처럼 살아가게 만든 건지.

6월의 어느 날이었다.

파닉스 수업을 시작한 지 약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아버지가 심정지로 쓰러지셔서 119에 실려가셨어.” 톡이 도착했다.

숨이 턱 막혔다.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날만큼은 회사원이 정말 부러웠다.

아이들 앞에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수업을 마쳤다. 그러나 그날도, 다음 날도 아버지를 뵐 수 없었다.

상태가 안정기에 접어든 뒤에서야, 30분간의 짧은 면회가 허락되었다.

응급실 침대 위, 아버지는 그동안 맞은 링거들에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155센티의 작은 체구에 기구들을 달고, 겨우 숨을 쉬고 계셨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담당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장녀시니까 오늘 돌아가시게 되면 가족회의를 하셔서 연명치료를 계속할지 결정하셔요.”

쓰러지기 전, 아버지는 자주 말했다.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

그래서였을까.

기계에 의지해 숨을 이어가는 모습이 마치 고문처럼 느껴졌다.

의식은 없었지만, 장기들은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젠 대학병원에서는 더 이상 모실 수 없어 2차 병원으로 전원 되었고, 면회는 주 3회로 줄었다.

오랜만에 뵌 아버지는 부기가 많이 빠져 있었다.

표정도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짧은 면회 동안 웃는 표정을 지었다가, 울 듯한 표정이 되기도 했다.

기침도 몇 번 하셨다.

입술에는 피딱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간호사는 말했다.

“가래를 뽑을 때마다 상처가 생기는 것 같아요.”

다음엔 립밤을 챙겨야겠다.

혹시 자극이 될까 싶어, 거칠어진 발을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그렇게 아버지 발을 만져본 것도, 마사지를 해드린 것도 처음이었다.

허벅지를 만져보니, 단단했던 근육이 물컹해져 있었다.

입원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나 빨리 소실되나 보다.

어머니는 지금도, 아버지가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을 거라고 믿고 계신다.

그 믿음이 어머니를 버티게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믿음 앞에서, 의학적 현실을 굳이 상기시키지 않고 있다.

언젠가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오신다면,

이제는 조용히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싶다.

책임도, 무게도, 모두 내려놓은 채.

여전히 아버지의 무게를 다 알지 못한다.


면회를 가서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버지의 동공에 나는 비치지 않았다.

아빠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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