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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있다.

아빠가 깨어났다!

by 마더 R

무더웠던 여름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 주 월요일이면 아이 둘이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방학은 워킹데이 기준 고작 14일.

아버지는 6월 중순 쓰러지신 이후 줄곧 준중환자실에 계셨다. 그래서인지 이번 여름은 늘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캠프 도중 혹시라도 전화벨이 울리면 어쩌나. 그런 마음이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캠프만큼은 끝까지 해내고 싶었다.

슈퍼거북 영어캠프는 올해로 벌써 세 번째다. 큰아들은 예전 같으면 "캠프 때문에 친구들처럼 놀러도 못 간다"며 불만을 털어놓곤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박물관 견학을 두 번, 광화문 미션을 한 번 넣어주자, 아이들의 얼굴에 기대와 설렘이 번졌다.

정작 가장 즐거워한 건 내 아이들였다.

시키지 않아도 영어 원서를 읽는 모습에, 문득 생각했다. '그래, 남편을 돕기 위해 회사를 내려놓은 게 잘한 일이었구나.'


집 근처에서 돈을 벌고, 동시에 육아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기특하다.

2023년 5월 육아휴직 이후로 벌써 2년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워킹맘의 습관이란 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당췌 쉬는 법을 잘 모른다. 예전에도 겨우 하루 연차를 내면서 네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계획하고, 결국 다 하지 못해 스스로를 탓하곤 했으니까.

병실 한쪽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집에서는 청소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교습소 수업 준비를 한다. 잠시 쉬는 시간이 도무지 없다.

올해는 제대로 된 휴가를 떠나진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매일 수영을 하고, 동네 도서관을 찾고, 소소한 식사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생각해 보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게 충분한 여름이었다.

아버지 곁은 줄곧 어머니가 계셨다.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면 힘들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럴 때마다 달려가 아버지 곁에서 하루 밤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캠프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아버지의 투병이 길어지자 남동생은 가족 돌봄 휴가를 쓰는 것조차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NGO에서 일하는 둘째는 잦아진 재난 사고로 야근과 출장이 이어졌다.

결국 어머니는 홀로 3주 가까이 버텼다.

교습소 여름캠프의 마지막 프로그램이 끝난 광복절 오후,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내가 교대를 가겠다고 하자, 평소 같으면 사양하시던 분이 “저녁에 올 수 있니?” 하고 물으셨다. 그 한마디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가 눈을 맞추고,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새벽 다섯 시, 간호사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보호자분, 일어나 보세요. 아버님께서 말씀을 하셨어요. 들으셨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는 눈을 굴리고, 입술을 움직이며, 세상과 연결되려는 안간힘을 쓰고 계셨다. 몇 주 만에 병실을 찾은 딸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 같았다.

아버지가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한마디라도 내뱉으려 할 때마다, 나는 곁에서 손을 잡아드렸다. 아버지는 그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셨다.

큰아들은 할아버지가 언젠가 다시 두 발로 일어나면 함께 여행을 가자고 소원을 빌었다.

싱가포르든, 오사카든, 발리든 어디든.

그날이 빨리 오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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