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의 미학

by 푸른향기



이를테면 앙파는 그 물러짐이 싹으로부터 시작되고 고구마도 쭈빗쭈빗

싹이 돋으면서 존재 변화를 시도한다

알뿌리들에게 알맞은 온도란 따로 있을까

단호박은 그 껍질이 야물고 단단해서 무엇보다 오래오래

몸을 단속했던 품새라 한두 달은 느끈히 버티겠지 마음 놓았던 거

게다가 보관에 능한 김치냉장고 속인데 뭘, 내가 너무한 건가

미심쩍어 들춰보니 오메, 볼우물 패인 노인 얼굴처럼 팍 쪼그라들었네

밑은 퍼질러 앉은 욕창 궁둥이처럼 허옇게 허물어졌는데

혹시나 곰팡 난 부분을 칼로 도려내니 아하, 딱 떨어져 나오네


여즉 살아있는 몸

절연한 인연처럼 번진 데는 없으니

한 끼 죽으로는 충분한 셈,





단호박을 좋아한다. 그냥 호박으로 죽을 쑤는 것도 좋지만, 단호박으로 죽을 쑤면 맛이 좀 더 텁텁한듯 두꺼워진다. 색깔도 노란 색깔이 참 진하다. 거기에 찹쌀가루를 조금 풀어 넣으면 제법 걸쭉한 죽이 된다. 겨우내 먹을 양으로 한 박스를 사서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그래서 알게 된 거였다. 단호박도 썩는구나. 왜 단호박도 썩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새로운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깝고 허무한 생각보다 새로운 느낌이 더 컸다. 단호박 같은 건 쉽사리 썩지 않을 거라는 내가 만든 고정관념이 물렁하게 무너지는 느낌. 그리고 살아남은 살이 주는 안도감... 그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젊음이나 시간 같은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데서 오는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무엇이 지나가도 온전히 살아있는 구석이 있는 우리네 삶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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