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를 썰며

by 푸른향기


내 가둬 둔 침묵 쪽으로 돌아앉는 시간

그것은 단풍잎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수굿한 저녁 빛 방으로 들어오는 때


무를 채 썬다

썰수록 수북해지는 흰

뜨물보다는 희고 투명한


오랜 시간 아무 색도 들여놓지 않은

이 맑은 시간의 무게


슬픔이라 하는 것이

혼자의 빛이라면 이러한가


단면을 썰어도

부서지지 않는 침묵은


그가 한 계절을 살아 지켜왔을

훼손당하지 않고 변절하지 않은

오롯한 현존이다


밑둥치의 연푸른 껍질

모른척 그를 감쌌던

아린 웃음을 도려내니


도마 가득 그의

흰 빛이 완성되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밥을 한다. 언뜻 돌아보면 창밖이 어스름으로 환하다. 어스름으로 환하다는 것이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오후 여섯 시에서 일곱 시쯤. 이른 봄의 그것은 겨울 어둠이 서서히 깨어나는 시간이다.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것만큼, 일찍 시작되었던 겨울 어둠을 풀어놓는 시간이다. 너무 환하지는 않게 그러나 보기 편한 빛으로 잔잔하게, 또는 시무룩하게.


겨울 무를 채 썬다. 바람 들지 않은 것을 기특해하며 무우의 단맛을 상상한다. 바람 든 무우는 얼마나 퍽퍽하고 허망한 맛이던가. 헛된 공기를 먹는 듯, 맛없는 말을 삼키는 듯, 고춧가루를 아무리 많이 치고 설탕을 넣는다 해도 맛이 없다. 겨우내 무우는 바람을 경계하며 제 몸을 단속해 왔을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자리에서, 예를 들면 지나친 북풍이 바로 들어오는 부엌 다용도실이나 너무 환한 햇빛이 들어오는 베란다 쪽이나, 그런 곳에서는 신문지로 몸을 감싸주어도 차라리 냉장고에 넣는 것만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무우는 며칠이 못 가서 맛이 빠져버리곤 한다. 겉은 쭈글쭈글해지고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도 잘라보면 바람구멍이 박혀있는 것이다.


저에게 딱 알맞은 자리에서 제 몸을 단속해 온 덕으로 얻어지는 빛깔이 있다. 무를 썰며 그 쌓여 가는 빛이 그런 빛이라고 생각해본다. 마치 한겨울을 넘어온 하루하루가 너무 환하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저녁시간을 이룩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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