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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Aug 19. 2021

나는 이제부터 그냥 감동하기로 한다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보며

버스에 내리고 오를 때마다 어느새 달려 나온 아이들이 “박시시”“박시시”하며 손을 내민다.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는 말을 듣고 슬쩍 사탕 하나 건네주면, 그 뒤에 있던 아이들이 떼로 몰려와 손을 내민다. 이제 그 아이들을 모른 체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어느새 그것도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차에 올랐다. 어젯밤엔 국경을 넘기 위해 출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사진을 붙였다. 말로만 듣던 네팔 땅. 히말라야가 떠오르고 흰 눈이 먼저 떠오르는 땅.


 나에 대한 탐구가, 스스로 결심하고 다잡고 실망하고 다시 되돌아가 절망하는 그런 탐구가 거의 바닥에 이르렀을 때 인도를 선택했다. 마음이 말라붙은 건기의 강바닥 같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허물어져 아무것도 받칠 수 없는 모래알 상태. 그 안에 무엇을 집어넣으려 했을 땐 허물어진 파편들이 뒷발까지 삼켜버리곤 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그래서 선택한 이 인도 땅에서 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런데 잠들기 전마다 차가운 맨바닥이 주는 안온함이 있다. 그 안온함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 밑자리에는 얼굴 검은 아이들의 순박한 미소가 있고 먼지 속에서 팔고 있는 튀김이며 과자가 있다. 소똥을 말려서 벽에 붙여놓고 아침 일찍 도로변에 나앉아 나마스테를 말하며 손을 내미는 아줌마들이 있다. 내가 그것들을 딛고 있는가. 그건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인가. 그건 또 아니다. 다만 맨 밑바닥까지 닿았다는 나의 절망이 모두 허세였음을 조금씩 느껴간다. 

내가 절망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틈을 빠져나가는 감촉 이상의 것이 아님을, 모래시계처럼 그것은 시간이 빠져나가는 모습,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는 것이다. 



 새벽어둠을 뚫고 버스가 아슬아슬한 오르막을 S자로 돌며 한참을 오른다. 정말 캄캄한 새벽. 하얀 별이 공중에 또박또박 떠있다. 그런데 별이라 하기엔 너무 굵고 가깝다. 산등성이를 밝히고 있는 하얀빛들.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 멋대로 ‘높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가슴 한 구석은 하얗다’, 뭐 이런 식의 시 구절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 도구였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새벽부터 문을 열고 있는 짜이 가게, 식료품 가게, 작은 찻집 그런 곳들이 밤새 꺼뜨리지 않고 밝혀 놓는 전등 빛이었던 것. 이때 머릿속을 맴도는 문장이 있었다.


 - 나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은 모두 관념이 세워놓은 탑에 불과하다     

멀리 동이 트고 해가 올라오고 있다. 설산 사이로 해가 둥실 떠올랐을 때 우리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매일 시작되는 태양이지만, 오늘 본 태양이 내가 본 일출 중에 가장 장관인 것처럼 나도 감격스럽다. 좀처럼 감격하지 않고 맨날 진지모드인 나. 도대체 얼마나한 감동과 이변이 일어나야 ‘전적으로 감동했다’라는 말이 터져 나올까.


쉽사리 감동하지 못하고 자주 웃지 못하며, 또 쉽게 울지도 않는 나. 언젠가 파도처럼 다가올 거대하고 격한 감동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 언젠가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나를 본다. 


그래서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보며, 그가 뿜어낸 일출을 보며, 나는 이제부터 그냥 감동하기로 한다. 다짐은 아니지만 자각이다. 이제부터 그냥 웃고, 헤프게 울기도 하자. 인생이 뭐 그리 진지한 거라고... 

  높다란 평지에 다다랐을 때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줄기, 나는 그 흰 등을 향해 계속 핸드폰 카메라를 눌러댔다. 나중에 다시 보겠다는 일념으로, 아니 그보다는 지금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타까움이 카메라를 누르게 했다. 지금은 이렇게 차갑고도 찬란한 법이니, 지금은 이렇게 희디희게 순수한 법이니...  지금이 바로 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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