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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Aug 16. 2021

지금 가진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뜨거운 물 한 바가지

둥게스와리. 즉, 버려진 땅. 2500년 전에는 시체를 버리는 땅이었다고. 지금은 아직도 남아있는 카스트제도의 맨 밑바닥의 사람들, 불가촉천민이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수자타 아카데미로 간다.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 학생들이 두 줄로 도열해서 환영해주었다.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환히 웃으면서 손을 잡고 학교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나는 그때 조금 울컥했다. 여기 오기 전, 마르고 시커먼 손을 내밀며 끈질기게 구걸하며  따라붙는 아이들을 보고는 ‘어쩌지...’ ‘아, 어떻게 하면 좋지..’, 했던 그 안타깝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다 녹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너희한테 특별히 미안해할 일도 없다고 부득부득 우기던 마음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검은 얼굴의 환한 미소와 그들이 만들었다는 금잔화 꽃목걸이 때문일까.


나보다  먼저 아이가 물었다. 이름이 뭐냐고. 내가 지극히 내성적이라는 것과 지극히 소극적이며 비활동적이라는 것을 딱 꼬집듯이. 나는 어쭙잖게 대답을 하면서 “your name?"이라고 겨우 물었다.

 아이들은 운동장 한편에 짜이와 과자 한두 가지를 준비해놓고, 가을부터 연습했다는 춤과 노래를 공연해주었다.


이틀 밤을 지내기 위해 올라간 숙소는 아이들이 쓴다는 교실이었다. 책상을 들어내고 시멘트 바닥에 두툼한 스티로폼을 깔아놓았다. 유리창은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창문은 꽉 닫히지 않았다. 벽은 어두침침한 시멘트 색. 낮에는 여름 날씨이지만, 해가 지면 급속히 추워지는 인도 날씨. 해거름인데 벌써부터 한기가 느껴지며 갑자기 스산해지고 막막해진다. 신발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출입구 맞은편 자리에 침낭을 깔았다. 우울이 밀려왔다. 어떻게 여기서... 침낭 머리맡으로는 가져온 짐을 꺼내느라 모두 캐리어 뚜껑을 열어젖혀 놓았으니, 마치 난민 대피소가 따로 없었다.


 또 다른 교실을 몇 칸 건너면 화장실. 휴지를 쓸 수 없는 화장실이다. 휴지를 쓰면 들고 나와서 따로 버려야 한다. 이곳 인도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휴지를 쓰지 않는다. 대신 꼭 뒷물하는 축소판 샤워기가 바닥에 달려있다. 그러니까 인도 사람들은 축소판 샤워기로 마지막 정리를 한다는 뜻인데, 인도를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써보질 못했다.


 씻는 것은 공동 샤워실에서 해야 했다.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받아와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샤워가 뜨거운 물 한 바가지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샤워를 공동으로 한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거기서는 필요 없었다. 나중에 그 뜨거운 물 한 바가지도 없는 숙소에 갔을 때 수자타 아카데미의 뜨거운 물 한 바가지가 얼마나 그립던지. 괴로움이나 부러움은 비교에서 출발하고, 그 비교를 멈추면 괴로움도 멈춘다는 것을 송두리째 알게 해 준 뜨거운 물 한 바가지! 내 지금 가진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뜨거운 물 한 바가지였다.      


 유영굴에 올랐다. 주민들이 오르막 가장자리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걸을 하는 모양이다. 그들에게 구걸은 하루 일과이며, 직장이며, 자식에게 물려주는 유업이다. 자식들은 부모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 배워, 그것을 업으로 알고 계속한다. 손을 내밀고 있는 자세가 간절하긴 하지만 그것도 비굴해 보이진 않는다. 너희가 가진 것, 조금 내놓으라는, 내 것을 돌려달라는 조금은 당당해 보이는 몸짓이다. 어떤 사람은 다리 한쪽이 구부러져 있고 어떤 사람은 팔 하나가 없고 어떤 사람은 손목 하나가 없다. 망토를 눈 밑까지 둘러쓰고 먼지 속에 앉아 있다.


 유영굴 입구를 티베트 절 사람이 지키고 있다. 그 사람 앞에 돈을 넣어도 되고 안 넣어도 그만. 여기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게 많다. 구걸하는 아이한테도 그렇고 물건 값을 깎는 것도 그렇고, 물건 값도 그렇고. 무엇이든 정해진 것이란 없다.


  시타림(시체를 버린 숲)과 동굴과 노천에서 한 인간이 6년을 지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극한 상황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느낌과 상황을 가늠할 수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부처가 한 실존 인간으로 다가온다.


 욕망의 정점과 고행의 정점을 모두 겪은 한 인간이 알려주는 길은 중도.  과거에 끄달리는 것도 미래의 짐에 시달리는 것도 다 욕망이 만들어낸 것. 욕망으로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고 괴로워진다. 죽고 싶을 만큼의 괴로움도 내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짜임에 틀림없다. 현재를 똑바로 보는 것이 중도이다. 그렇게 이해한다. 현재를 놓치지 않는 것이 괴로움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고, 괴로움을 증폭시키지 않는 길이다.

 

전정각산 아래 있는 둥게스와리 마을로 들어갔다. 한 가족이 방 하나에서 같이 산다. 그들의 소유는 아궁이와 아궁이에 올리는 항아리와 이불 몇 개가 전부이다. 바닥은 흙바닥이거나 그 위에 깔아놓은 짚. 소나 염소처럼 사람도 그와 같이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잔다. 소와 염소가 그런 것처럼 그들도 집 뒤로 돌아가 오줌도 누고 똥도 눈다. 소가 누운 똥은 손으로 잘 다듬어서 벽에 붙여 말려두었다가 귀한 손님이 올 때 땔감으로 쓴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의 구분이 별로 없다.

밥은 카레가루 같은 것에 비벼서 손으로 집어먹는다. 그 손이 더럽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그곳을 보고 눈물이 나고 어떤 사람은 짐승처럼 사는 사람을 싫어하고 또 어떤 사람은 괴로워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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