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향기 Mar 29. 2022

남편 몰래 한 일

  봄이 오고 있다. 벌써부터 수선화는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주택에 살고 보니 봄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알게 된다. 물론 농사짓는 사람들이 그 시작을 먼저 알고 있겠지만, 시골에 얹혀 사는 우리로서는 고작 나뭇잎 솟는 거나 나뭇가지 색깔이 달라지는 정도로 실감을 하는 정도이지만 그 정도도 참으로 고맙고 반갑다. 

 동지가 지나면서 봄은 은근히 시작되고 있었다. 낮 길이가 눈꼽만큼씩 길어지는가 싶더니, 오후 여섯 시가 되어도 캄캄하지 않다. 하루 기온도 추웠다가 포근했다가를 반복하지만 그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우리집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건 수선화이다. 

  이 집으로 이사올 때부터 심었던 수선화는 다른 것들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살아 남았다. 조금 있으면 꽃대도 제법 올라와 노란 얼굴을 나란히 나란히 밝혀 줄것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물방울이 묵직하게 맺혀 있는 것처럼 노르스름한 꽃대가 올라와 있다. 이미 제주도에는 수선화가 한창이라고 들었는데 여기도 이제 얼마 안 남은 듯하다. 아직 2월이라 영하의 날씨이지만  땅 속에는 이미 봄이 와 있다는 뜻이리라. 

 마당 한 가운데 매화도 끝자리가 붉으스름해져 있고 아주 작은 꽃망울이 맺혀 있다. 작년보다 꽃송이가 더 많이 맺혀 있다. 작년에는 매실로 엑기스를 만들었다. 마트에서 산 것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제법 매실 향기가 있다. 목련은 작년 겨울부터 꽃눈을 내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복슬복슬한 꽃눈이 제법 커지고 두툼해졌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작약도 붉은 새순을 가지 끝 쪽으로 내밀고 있다. 조금 더 있으면 사방에서 봄이 왔다고 난리일 거 같다. 

 꽃들이 피어날 때는 꽃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풀들도 다 깨어 일어난다. 잔디도 푸르스름해지고 그 틈에서 온갖 이름 모를 잡초들이 움터온다. 잡초! 세상에 잡스러운 풀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참 오랫동안 잡초와 씨름해 왔다. 마당에 잔디를 깔아놓고 잔디를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다. 틈만 나면 쭈그리고 앉아 풀을 뽑았다. 풀은 뽑아도 뽑아도 어째 그리 잘 생기는지 모를 일이다. 생명의 기세는 참으로 무섭고 끈질기다. 조그만 게으름을 피우고 있으면 사방으로 그 기세를 뻗친다. 특히 장마철이 되면 텃밭은 아예 잡초무더기가 되어 버리고 잔디밭에 나던 잡초들도 무지하게 뿌리가 굵어져서 웬만한 힘으로는 뽑혀 나오지 않는다. 덕분에 풀을 뽑으면서 근심도 덜어내고 시 몇 편도 건지긴 했지만 그 공보다는 피해도 적지 않다.   



풀을 뽑으며


엉덩이방석 차고앉아 풀을 뽑는다 장마철 이른 아침

영 쓸모없을 거 같은 이름 모를 풀

그것 생긴 모양새가 꼭 

늙은 얼굴 검버섯에 올라오는 한두 가닥 수염 마냥

몇 가닥씩 시작하더니만 어느새 수북해졌다


별 힘 안 들이고 뽑힐 거 같았는데 

그 뿌리가 얼마나 질기고 길던지

그중에 콩알 만한 꽃 동글동글 있는 것은

웬만한 힘으로는 뽑혀 나오지 않는다


잎도 맥없이 가늘고 꽃이라고 생긴 건 

푸르스름한 멍울밖에 안 되는 그것이

땅을 꽉 움켜잡고 파고들고 있는 모양새가

고집 센 노인 같아 밉기까지 한데


별일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뿌리라는 게

어느 내면처럼 저렇게 엄청난 것일 수도 있겠거니

시큰대는 팔목을 주무르며 생각해본다



 정말 풀이 사람처럼 밉기도 했다. 풀 힘에 못이겨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때는 더욱 그랬다. 도대체 풀이 뭐라고 이렇게 내가 고생하나 싶어서 화가 나기도 했다. 풀과 경쟁하려고 하지 말라, 풀과 씨름하지 말라, 그러면 반드시 진다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결국 나는 풀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팔꿈치 엘보가 왔다.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몰라도 나는 그 원인을 풀에게 두어버렸다. 풀을 뽑다가 내 팔꿈치가 망가졌다고. 물리치료며 체외충격파 치료며 침이며 뜸이며 온갖 것을 이 년정도 했다.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철이면 다시 도지고 해서 이제는 지병이 되어버렸다. 그러더니 작년부터는 무릎이 아파와서 오랜시간 동안 앉아 있기가 힘들게 되었다. 나이 탓이라고 하지 않고 나는 또 죄없는 풀에게 죄를 덮어 씌운다.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그래서 오늘은 작년부터 마음 먹었던 대로 제초제를 잔디밭에 뿌리고 말았다. 잡초 제거제는 잔디가 움트기 전에 뿌려야 된다고 했다. 어제 농약사에 가서 두 봉지를 사다가 오늘 아침에 뿌렸다. 남편 몰래. 남편은 출근중, 나는 놀고 있는 때. 이럴 때가 드물기 때문에 시기를 점 찍어 놓고 있다가 남편에게 말 안하고 뿌렸다. 작년에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올해는 반드시 약을 뿌리자고 약속했지만, 분명코 남편은 또 다른 이유를 대면서 안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몰래 했다. 또 다른 이유란 남편이 올해 2월에 퇴직을 하니 본인이 시간 날 때마다 풀을 뽑으면 된다고 할 것이란 점이다. 여태 한번도 잔디밭에 약을 치지 않은 이유는 남편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생태 옹호자이면서 자연주의자! 뭐든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사람이다. 풀을 뽑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니, 웬만하면 놔두고 보자는 주의이고 나뭇가지 잘라주는 것도 인위적인 일이니 냅두자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집 감나무 열매는 늘 부실하고 살구며 매실이며 자두며 무화과며, 거의 모든 과실나무는 열매 몇 개 비실비실 열리다가 떨어지고 만다. 그나마 감나무는 몇 번 수확의 기쁨을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비닐 장갑을 끼고 바람 방향을 피해서 뿌려주었다. 독한 냄새가 났다. 땅에게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내 몸이 아픈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날씨가 아직 추워서인지 잡초 싹이 많이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담 주변 그늘진 곳으로는 수북히 풀이 크고 있지만. 약을 뿌려서인지 모르겠다. 얌체처럼 수선화 앞을 서성인다. 잡초는 죽이려고 하고 꽃은 보려고 한다. 노란 꽃대에서 꽃이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작년 이맘 때는 꽃이 피었던 거 같은데 아직 꽃대가 물방울만큼하게 작게 보인다. 수선화가 제초제 냄새를 맡아 버렸나? 그러고 보니 매화나무 꽃순도 작년보다 더 자잘해진것 같기도 하고... 설마하고 있지만 예민한 이것들이 나의 소굴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나중에 올해는 풀이 별로 안 나네잉? 하고 물어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 글쎄, 그런가? 내년에도 이럴 것 같은데?!!


                                                (3월 마당에서 피고 있는 꽃)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도 시를 쓰는 까닭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