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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Feb 03. 2022

그래도 시를 쓰는 까닭은




 무엇을 해야 할지 얼른 손에 잡히지 않는 일요일 오후. 코로나 안전문자가 계속 온다. 집에 머무르라고. 그래서 집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 곧 온다는 태풍 때문에라도 꼼짝없이 갇혀 있는 시간이다. 하긴 밖에 나간다 해도 동네 한 바퀴 산책이나 하겠지만. 듣고 있던 원격 연수나 들으러 컴퓨터 앞으로 갔다.

 책상 밑에 내 시집이 상자 밖으로 죽 나와 있었다.

“ 이거 뭐야? 왜 이렇게 해놨어?”

“ 으응, 발 뻗기가 힘들어서 좀 치울라고”

 출판사에서 온 택배 상자를 그대로 책상 밑에 놓았는데 남편이 그걸 풀어서 책 무더기를 한쪽에 쌓아놓았다. 흰 표지의 내 시집을 두부처럼, 아니 벽돌 쌓아놓은 것처럼 해놓았다. 순간 열이 팍 올랐다.

“ 박스 다시 가져와, 이렇게 하면 책이 노래지잖아”

남편은 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무 말 없이 다시 작은 박스를 가져와 되담는다. 원래 있던 박스보다 작은 것 두 개에 나눠 담고 반대편 벽 쪽으로 붙여 놓는다.

“ 어때 이러면 괜찮지?”

“ ··· ···.”

 그래 괜찮다. 뭐 어차피 집에만 있을 시집이니.

 팔리지도 않고, 누구에게 보내기에도 이제는 마땅치 않은 나의 첫 시집이다. 십 년 넘게 ‘시를 왜 쓰나’,‘나는 시를 쓸 수 있나’ 하는 자문자답을 골백번 해가며 띄엄띄엄 썼던 시를 모아 어렵게 출판했다.

 출판하는 데는 약 이백만 원쯤 들었는데, 출판된 시집을 사는 조건이었다.  이백만 원에 해당하는 시집이 세 개의 박스에 담겨 택배로 왔었다. 한 박스 정도는 아는 사람, 별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에게 보내고 나니, 두 박스는 거의 풀지도 않고 통째로 남았다. 오늘 남편이 했던 일은 박스 하나를 풀어서 낱권으로 쌓아놓으려 했던 것. 박스가 책상 밑에 있으니 다리 올리기가 힘들다고. 나는 내 시집이 괄시받고 있는 거 같아서 열이 올랐던 거고.

(박스에 담겨 있는 시집)

 비록 유명하지 않은 작은 출판사에서 펴냈지만 나름 깔끔하고 내용도 유명한 사람 것 못지않게 괜찮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첫 시집에게 준다는 ‘세종문학도서’에도 선정되었고, 몇몇 아줌마들은 어떤 시를 읽고는 눈물을 흘렸다는 감동 섞인 평도 해준 바 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시집을 냈다고 광고 한번 해주는 데 없고, 원고 청탁 한 번 받은 적 없다. 소도시의 작은 문예지에 한두 번 시를 싣기도 했지만 그게 다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이 묵어가는 것처럼, 내가 시집을 냈다는 사실은 잊히고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괴감, 무력감, 허무함이 쏟아져 들어온다.

쓰면 뭐하나 ··· ···. 이렇게 시를 놓지 못하고 쓴다고 해서 누가 나를 알아주나. 또 옛날처럼 내 돈을 들여서 시집을 낸다고 하더라도, 또 서재 귀퉁이에서 시집은 먼지만 쓰고 있을 텐데.

 나는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혼자서 머리를 싸매고 애를 쓰고 있는 꼴이다. 글이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인데, 나의 독자들은 없는 셈이다. 물론 글에는 자아 치료와 자아성찰이라는 케케묵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고작 자아성찰을 하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마음의 애를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남편도 시를 쓰는 남자! 그러나 남편은 나보다 더 전력이 세고 이 지방에서는 그래도 알아주는 작가이다. 문학 판에도 끼고. (글을 쓰는 사람에겐 문학 판이라는 게 있다. 같이 어울리기도 하지만, 그게 하나의 세력이 되기도 한다)

 남편은 드문드문 청탁이 들어오기도 하고 원고료도 받아서 따로 챙기고 있다. 남편이 출판사로부터 청탁을 받는 것을 전화로 들을 때면 으레 그런 생각이 든다. ‘좋겠다, 당신은 청탁도 받고.’

 안 그래도 쪼그라드는 정체성이 남편 옆에서는 더 쪼그라든다. 비교하는 마음, 열패감, 형편없음··· ···. 그런 마음이 나를 아주 작게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물론 겉으로는 의연한 척, 축하하는 척하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익혀온 자존심 연마 때문이다.

 나는 내 스스로 시인은 못되나 보다. 남이 인정해주고 알아주기를 이렇게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남에게 기대서 내가 시인이고자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니, 의욕이 사라지고 ‘쓰면 뭐하나’ 하는 생각만 자꾸 드는 것이다.

 군대에 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도 소설가 지망생. 아들에게 속마음을 얘기해봤다.

“ 그냥 써, 그것이 예술이란 거 아냐? 안 돼도 그냥 하고 있는 거···. 지금은 안 쓸 것처럼 말해도 언젠가는 또 쓰고 있지 않을까? 나도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거 같아···. 인간이 뭘 해야 한다, 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강제 아닌가? 인간 스스로 만들어놓은 굴레? 뭔가 안 되어도 그게 그냥 그대로 인간이지 않나? 사람들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종속되잖아. 의미를 만들지 않아도 인간은 그대로 의미 있지 않아? 아니면 쉽게 생각해봐, 매달리지 말고. 써지면 쓰고 안 써지면 또 안 쓰고. 나이 들었으니 그런 상태도 괜찮지 않을까? 꼭 글로 먹고살아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 ”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한다. 아들의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래, 안 돼도 그냥 하고 있는 게 예술이다.  스물세 살 아들에게 한 수 배운다. 그래, 그냥 쓰고 싶을 때 쓰자. 안 써지면 괴로워하지 말고 누구 탓하지 말고, ‘나를 알아주라’고 남에게 껄떡대지 말고, 안 써지면 ‘인제 살만한가 보지’라고 생각하자. 그러다 써지면 또 쓰는 것이고. 일기 쓰듯 그냥 써보자.

 어쩌면 그냥 쓴다는 것은 그냥 산다는 것과 비슷한 문제인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건 말건 삶은 엄연히 내 앞에 당도해 있는 것이고, 그 명백한 사실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 삶이지 않은가 말이다. 나에게 시는 삶과도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내 삶이 시시하면 내 시도 시시한 거고, 내 삶이 의연하다면 시도 잘 쓰건 못쓰건 당당한 거겠지.

 누가 알아주어서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누가 알아주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자.

 오늘의 결론은 ‘가볍게, 가볍게’이다. 지금은 회의하고 의심하고 있는 시기. 다시 쓰고 싶을 때가 있겠지. 아니, 쓰고 싶을 때보다는 그냥 써지는 때가 있겠지. 그런 때가 안 와도 좋다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다만 지금은, ‘그냥’이라는 말을 좋아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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