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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무지개 Jul 24. 2024

마음과 종이

내 마음의 휴지통은 어디에 있을까?

내 취미 중 하나는 그림 그리기이다.

그중에서 수채화를 즐겨 그리는데 투명한 듯 표현되는 색감과 따스함이 좋다.

내가 수채화를 그릴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연필 스케치와 물이다. 

수채화는 스케치를 너무 진하게 하면 지우개로 지운 후 물감을 칠해도 자국이 남는다.

그리고 물 조절을 잘못하면 물감이 번지거나 그림 자체가 이상해져 매번 물 조절과 씨름하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실력 없는 이의 변명처럼 더 좋은 재료, 특히 종이가 필요하다고 중얼거린다.


대부분 수채화 재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이’라고 말한다.

물감이 종이에 스며들어 그 재질이 그림의 표현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손상 없이 물과 물감을 충분히 받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채화 종이는 질감, 무게, 면 함유량, 제조방식 등에 따라 분류된다.

먼저 제조방식은 종이의 황변현상이 적은 중성지(Acid free)가 좋다. 

면 함유량은 높을수록 물 흡수력과 발색이 좋으며 종이의 손상이 적다.

다만 면 100% 종이의 경우 스케치나 지우개질이 마냥 쉽지 않아 초보자라면 어려울 수 있다.

질감은 종이의 압축 차이로 구분된다. 

세목, 중목, 황목으로 나뉘는데 황목으로 갈수록 종이의 표면이 거칠어서 

표현하고 싶은 그림에 따라 선택한다. 주로 중간 질감의 중목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종이의 무게는 무거울수록 두께가 두꺼워지고 밀도가 높아진다.

두께가 두꺼운 종이는 물로 인해 종이가 찢어지거나 우는 것이 줄어들고 더 많은 물감을 올릴 수 있다. 

그래서 300g의 종이를 많이 사용한다.


수채화 종이를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마음이 떠오른다.

내 마음이 종이라면 나는 어떤 종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좋은 두께와 적당한 재질로 내가 느끼고 있는 물과 물감 같은 감정들을 잘 받치고 있을까.


나는 공감 능력이 좋은 편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감정을 살피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좋은 점이자 피곤한 점이다. 

이해라는 이유로 다른 이의 감정이 내 마음에 불필요하게 흡수되어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나는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을 만나면 

공감하기를 포기하거나 자꾸 덧대어지는 감정에 피곤해진다.

매일 느끼는 나의 감정도 다양하다. 

가끔 잘 느끼지 못할 뿐 기쁨, 슬픔, 우울, 짜증, 재미 같은 여러 감정들이 

아마 수십 번도 더 내 마음을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로 인해 생기는 감정들에 때로는 마음이 너덜 해지거나 찢어지기도 한다.

불필요한 감정들을 덜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이 더욱 편안할 텐데.


수채화를 그리기 위한 좋은 종이는 물과 물감을 잘 받치고 잘 표현하며, 손상이 적은 것이다. 

결국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종이는 물을 너무 많이 흡수해 잘 찢어지거나 너덜 해진다. 

많은 물감을 올리는 것도 힘들다.

마음도 그렇다. 얇은 종이 같은 마음은 쉽게 상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올리려는 색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두껍고 좋은 재질의 종이가 필요하듯이 

마음에도 감정을 잘 받칠 수 있는 튼튼한 두께가 필요하다.

내 마음이 어느 정도 튼튼하고 두꺼워야 다른 사람의 감정이 습자지처럼 스며들어 

날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나와 모두의 감정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게 잘 받쳐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재질과 두꺼운 종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나의 마음을 지킬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감정과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들어주고 이해하려 노력할 뿐이다. 그러니까 다른 이의 감정에 마음이 너덜 해지지 말자. 

다른 사람이 주는 감정에 내가 상처받지도 말자. 

내가 가지고 있는 쓸모없는 감정들은 마음에 깊게 남기지 말자. 

가벼운 스케치로 생각하고 언제나 지울 수 있게 하자.

내 마음이 중성지에 면 함유량 100%, 중목, 300g의 좋은 수채화 종이가 될 때까지 

열심히 튼튼해지는 연습을 하자. 그래서 마음에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오늘도 나는 이렇게 좋은 종이가 되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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