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
“A 서방 피곤하니까 푹 쉬게 둬.”
“네가 싫어한다고 안 사다 먹지? A 서방 먹게 잘 챙겨줘.”
“A 서방 고생하는데 너무 뭐라 하지 말고.”
아니 엄마랑 통화하는 것은 나인데 가끔 저런 대화가 오가면 나도 고생하고 있다고 툴툴거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사다 먹을 거라는 반항심도 생긴다.
엄마 딸은 나인데 왜 A 서방을 각별히 챙기라고 하는지. 서운하다. ‘나 좀 챙겨주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게 된 것이 있다.
결국 엄마가 하는 말들은 남편과 오손도손 잘 살아서 내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엄마가 살던 시대의 모습을 비춰 돌려 말한다는 것을.
엄마는 딸이 결혼하고 나서 남편과 잘 지내고 있나,
싸우지는 않을까, 무시당하지 않을까 늘 걱정하는 사람 같다.
그럴 때면 엄마와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참 많이 다르구나를 느낀다.
엄마는 가정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지만 나는 나의 행복도 중요한 사람이다.
엄마에겐 남편과 자식이 먼저지만 나는 내가 일 순위였으면 한다.
내가 있어야 가정도 있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어머니도 본인보다 남편과 자식이 더 먼저인 사람이다.
시댁에서 식사를 할 때면 언제나 본인 밥은 제일 마지막에 뜨고 마지막에 자리에 앉는다.
엄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다 그렇진 않지만, 대부분 엄마들은 자신의 희생을 우선순위로 삼는다.
그래서 엄마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프다. 미안하다.
친구들도 말한다. 엄마로 살다 보니 이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잊어버린다고.
남편과 자식이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나에 대해선 잘 모르겠단다.
음식을 먹을 때도 자신보다 가족이 좋아하는 것을 차리고 어딜 가도 먼저 신경 쓰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의 희생을 알게 된다며 한숨을 쉰다.
그걸 들으며 묻고 싶었다. 너는? 너의 자리는 어디 있어? 너는 너를 알아? 그들 말고 너 말이야.
친구들에게 “너 좀 챙겨”라고 말하면 “그러게” 하며 푸념하거나, “엄마로 살아봐. 그게 쉽나” 하고 답한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더 어려운 희생을 하고 있는데 자신을 챙기는 일이 그리 힘들기만 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인 나는 내 친구들이 가족을 위해 희생 말고 차라리 양보를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잠깐이나마 자신의 숨을 쉬었으면 좋겠다.
나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슬프면서 싫다. 누군가 희생해서 행복하다면 그게 정말 모두가 행복한 일일까?
엄마로서, 개인으로서 양보할 수는 있지만 꼭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걸까.
나보다 더 잘 알고 신경 쓰며 챙기던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위해 떠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엄마라는 희생의 훈장. 아니면 나라는 빈 껍데기. 나에게 나를 빼면 빈껍데기일 뿐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엄마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눈물 나고 아름답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엄마가 희생이라는 굴레에 갇혀있지 않았으면 한다.
엄마 마음에 엄마만 있지 말고 나라는 자리도 생겼으면 좋겠다. 나로서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엄마도 오랜 세월 가지고 있던 엄마라는 자리를 잠시나마 내려놓고,
한 사람으로 자신이 행복해하는 일을 했으면 하고 바라본다.
“엄마, 다른 사람만 챙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혼자라도 먹고. 엄마를 잘 챙겨요~”
그러면 엄마는
“나는 늘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 걱정하지 마. 너나 신경 써.”라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