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담은 음식
여름이 끝났다.
아직 더위는 남아있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말해주고 있다. 계절이 변하고 있다고.
입맛도 바뀌고 있다고. 더위를 차갑게 식혀줄 음식 대신 조금씩 따뜻한 음식이 좋아진다.
하지만 아직 이 여름을 보내기 아쉬워서일까. 남은 더위가 더 덥게 느껴져서일까.
여전히 차가운 여름 음식이 먹고 싶다. 달달하고 시원한 빙수가 먹고 싶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자연스럽게 빙수, 팥빙수는 나의 여름에 함께 있었다.
여름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잘게 갈린 얼음과 단팥. 우유와 달달함을 더해줄 연유.
그 위에 뿌려지는 미숫가루와 떡, 젤리, 프루트칵테일. 마지막으로 딸기와 초코맛 시럽.
하얀 얼음에 화려하게 알록달록 꾸밀수록 맛있어지는 팥빙수였다.
내가 학창 시절 팥빙수 제조기가 유행했었다.
밖에서 사 먹을 수밖에 없었던 팥빙수를 마음껏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집들이 제조기와 재료들을 잔뜩 구입하였다. 덕분에 여름 내내 팥빙수를 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무척 신이 났었다.
집집마다 시럽이나 미숫가루같이 올라가는 재료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꼭 필요한 단팥, 우유와 연유만 있어도 괜찮았다. 차가운 얼음이 살짝 녹아 단팥과 우유, 연유와 어우러지는 시원하고 달달한 맛으로 충분히 좋았다. 물론 나는 젤리와 프루트칵테일을 제일 좋아했다. 이 재료들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아서 넣을 수 있을 때 듬뿍 넣어야 했다. 선착순이었다. 어느 날은 팥빙수에서 이 재료들만 얼른 골라 먹고 추가로 더 넣은 적도 있었다. 비밀이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막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서울 강남역에 약속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 갔는데 그곳에 유명한 팥빙수가 있다고 했다. 우유 빙수였다. 일단 다른 팥빙수처럼 섞지 말고 먼저 한 숟가락 떠먹어 보라는 말에 입에 넣는 순간 나는 놀랐다. 입안에서 고소한 얼음이 사르르 녹아 바로 사라져 버렸다. 올라가 있는 재료는 팥과 인절미뿐이었는데 대패로 썬 것 같은 얇은 얼음이 달콤하면서도 고소했다. 나와 새로운 팥빙수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로 팥빙수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얼음은 점점 눈송이로 변해갔고 올라가는 재료들은 다양해졌다. 더욱 화려해졌다. 예전에 팥빙수는 화려하지만 투박한 느낌이었다면 요즘 빙수는 세련되게 잘 꾸민 느낌이랄까. 맛과 모습 둘 다 말이다. 하지만 어떤 모습이든, 어떤 맛이든 크게 상관없다.
빙수는 취향이다.
팥빙수는 자연스레 빙수 그 자체를 말하는 이름 같았는데, 지금은 빙수의 맏이가 된 것 같다.
빙수가 팥빙수 하나였을 때는 빙수를 먹는 게 팥빙수를 먹는 거였는데 종류가 많아지고 다양해지면서 ‘팥빙수’라고 정확히 말해야 한다. 여전히 빙수를 대표하는 이름이지만 예전에 비해 줄어든 관심에 조금은 서운해할까. 대신 이제는 사계절 내내 만날 수 있으니 괜찮으려나.
여름 음식이지만 사계절 음식도 돼버린 빙수가 나는 아쉽지 않다. 겨울 빙수도 맛있다.
여름에는 시원한 눈을 먹는 것 같은 대리만족을 주고 추운 겨울날에는 달달한 눈을 먹는 것 같은 행복을 선물한다. 빙수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어떤 종류를 먹어도 맛있다. 그때그때 먹고 싶은 종류가 다를 뿐이다.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처음 사이에 놓인 오늘. 빙수가 생각난다.
이 더위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선선한 바람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마음껏 누려야겠다.
덥고 힘들었던 일들을 잊게 해 줄 여름 빙수의 시원함과 달달함을 말이다.
오늘은 어떤 빙수를 먹어볼까. 돼지바 빙수는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