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과 다자이 오사무를 함께 읽으며
'심성이 고운 소년과 소녀는 남을 돕고 착한 일을 하여 오래오래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다. 헌데 마음에 와닿진 않는다. 희망찬 이야기만이 삶의 지침서가 될 순 없다. 구원받아야만 구원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구원이라는 건 뭘까. 그에겐 그 모든 일련의 행동이 구원을 향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종국엔 구원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세상엔 이런 문학도 존재한다. 자기 파괴적이고 한없는 우수로 가득 찬.
우리가 《인간실격》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응시할 수밖에 없다. 다자이에 대해 논하는 수많은 사람이 《인간실격》 을 그의 자서전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다자이는 요조와 마찬가지로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된 경험이 있으며 후반부에 등장하는 칼모틴이란 수면제도 20세 무렵 그가 첫 자살 기도 때 사용하였던 약물이다. 특히 작중 쓰네코에 대한 서사는 다자이의 실제와 숫제 차이가 없다. 다자이의 두 번째 자살 기도는 우연히 만난 카페 여급인 다나베 시메코와의 사흘간 동거 후 가마쿠라 해변에서 자행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다자이만 살아남아 자살방조죄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실례가 작품에는 시메코에서 쓰네코란 이름으로 바뀌어만 있을 뿐, 우연한 만남부터 기소유예까지 창작의 소설이 아닌 현실의 기록처럼 고스란히 적혀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린 작품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다자이가 어째서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부정하기라도 했다는 듯 질기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려 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기도는 상기하였듯 그의 나이 불과 20살 때 수면제 칼모틴을 복용하는 것으로 처음 도화선을 지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며 한창 문학에의 꿈을 꽃피우던 다자이가 대뜸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는 건 분명 이전 삶의 배경에 다른 기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시 은행의 소유주이자 귀족원 의원인 대지주 쓰시마 겐에몬의 6남으로 태어난 다자이 오사무는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유복한 환경 아래 자라왔다. 그런 그의 유년 배경하곤 이질적이게도 작품에 나오듯 그는 20대 초반 무렵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 적극적으로 다양한 활동에 가담하였다. 이는 그가 평생 그를 둘러싼 집안의 지원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며 부채 의식을 느꼈기 때문인데, 그의 작품 《고뇌의 연감 (1946)》을 보면 이러한 그의 심정이 드러난다. "돈 없는 천민만이 옳다. (중략) 그러나 나는 천민이 아니었다. (중략) 나는 열아홉 살 먹은 고교생이었다. 반에서 나 혼자만 두드러지게 호사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가 평생토록 공산주의 사상을 옹호한 데에는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대해 누릴 자격이 없다는 죄책감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응당 사회의 것이어야 한다는 부채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첫 번째 자살 기도는 더불어 당시 동경하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자살 소식과 학업의 실패로 인한 집안의 부담감이 더해져 복합적 영향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난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기보단 자기 자신을 '자격 없는 인물'로 생각하며 살았다는 부분이다.
이러한 다자이의 천성은 작중 요조를 통해서 은연중에 투영된다. 요조라는 인물은 어려서부터 내면에 인간에 대한 막연한 불신을 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어렸을 때를 회고하며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중략)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존재인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불신의 시작이 대개 인간관계의 상흔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보편적 사실과는 달리 유년 시절 요조의 인간 불신은 요조의 타고난 성격 탓으로 읽힌다. 우리가 불신을 대개 우리 외적인 이유로 돌리며 타인과 세계의 결함을 이유로 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요조의 어린 시절부터 줄곧 계속된 불신은 그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상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지나치게 여린 성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요조의 이런 유약한 성격은 그가 사람들을 대할 때의 모습에서 반복하여 나타난다. 요조의 유일한 무기였던 익살이 통하지 않았을 때, 즉 다케이치가 그에게 "부러 그런 거지."라 할 때나 그의 각혈을 두고 검사가 "진짜야?"라며 진상을 의심할 때 그는 타인을 속여 상처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지듯 불안해한다.
그러나 요조를 세상의 가녘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를 '인간관계에 무용하고 겁약한 인간'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요조는 누군가 자신에게 화를 낼 때면 마치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는" 듯 두려워했고 "말싸움도 자기변명도 하지 못"했으며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작품에서는 묘사되지 않는 바이나 그가 차라리 자기 내면의 고뇌로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을 드러냈을 때의 타인이 받을 상처에 더 마음을 기울이는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작품에서도 그가 소위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보다 어딘가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조가 함께 생활했던 여성들을 살펴보면 쓰네코는 남편이 사기범으로 옥살이를 해 홀로 생애를 감당하고 있었으며, 시즈코는 사별한 남편을 뒤로 두고 어린아이를 홀로 키우는 미망인이었다. 그럼에도 쓰네코와의 시간을 회고할 때 '행복했다'라고 말했으며, 시즈코의 아이를 마치 아버지라도 된 양 보살펴 주었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아는 독자라면 '행복하다'라는 표현이 이 작품에서 얼마나 이질적인지 금세 알 것이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략)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문장으로 우린 요조가 얼마나 순수한 인간성을 바랐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불과 대여섯 살에 불과한 시즈코의 딸 시게코가 "진짜 아빠가 갖고 싶어."라는 말 한마디에도 "아찔하고 현기증"이 나 시게코를 "타인. 불가사의한 타인. 비밀투성이 타인."이라 말할 정도로 불안정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바로 이 불협의 지점에서 파멸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시즈코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의 만화에 충실히 임하는 척, 시게코에겐 좋은 아빠인 척 행동했더라면 요조는 배 따스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테다. 요조가 아무리 방탕하게 산들 시즈코는 "아빠는 말이야,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에요. 너무 착한 사람이야, 그래서·····"라 말하며 그를 감쌌다. 그렇지만 요조는 시즈코와 시게코의 대화를 몰래 듣고선 다시는 시즈코 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때의 요조는 "행복한 거야, 이 사람들은. 나 같은 멍청이가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이제 곧 두 사람을 망쳐 놓을 거야."라며 둘의 행복을 바라는 동시에 비참한 자기 비하를 거듭하며 도망친다. 요조가 인간의 순수를 갈망할수록 거듭되는 일련의 자기 파괴는 요시코를 만나 끝내 파멸에 치닫는다. 요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시코의 천재적인 신뢰감, 그건 결국 그녀에게 독이 되어 돌아온다. 그녀는 요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무런 의심 없이 손님을 맞이하다 몹쓸 짓을 당한다. 요시코의 무한한 신뢰가 한없는 불신이 되어 쇠락할 때 요조는 허공에 대고 묻는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 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 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인간성이 상실한 세상 한가운데서 순결한 인간성을 바란다는 것. 그 모순 속에서 끝내 답은 구해지지 않았다. 과연 인간실격인가.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요조가 스스로 실격을 자처하는 모습은 세상을 이렇게 두지 말아 달라는 다자이의 작고도 간절한 외침으로 들린다. 다자이와 요조에게 자살은 지나친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 붕괴 반응이 아니었다. 답을 구하지 못한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끝없는 시도였다. 술과 마약처럼.
다자이와 요조는 묻는다. '어째서 세상은 그리도 철저하게 위선과 허위로 가득 차 있던 걸까. 그대는 한순간도 내게 진실할 수 없었나.'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이기와 허례의식은 생존을 위한 유용한 도구다. 우리는 끝없이 속고 속이며 살아간다. 그런데도 이런 작품과 마주할 때면 나는 세상의 무구한 면에 가닿곤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를 만난다. 그게 넌지시 오고 가는 수천의 격려보다 큰 위로가 된다. 아무리 세상 끝 궁지에 몰려도 이 책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버텨낼 것만 같다. 나에게도 요조가 꿈꾸던 순수가 있다.
다자이 자신이 투영된 요조를 인간미만이라는 듯 신랄하게 적어놓고서는 하필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으로 끝마친 건 왜일까. 어렴풋이나마 다자이 오사무의 편린에도 그토록 염원하던 이상과 마주한 꿈같은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다다르면 나는 왜인지 모르게 힘이 난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자상하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