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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러브>

우아함과 강렬함이 극대화되는 엔딩만으로도.

by 뭅스타

감각적인 묘사와 서정적인 영상미로 큰 호평을 받은, 이른바 '루카 구아다니노의 욕망 3부작'의 시작을 알린 2009년작 <아이 엠 러브>를 재관람을 통해 관람하였다. 올해 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개봉을 앞두고 IPTV로 관람했던 터라 재개봉할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기다릴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관람 직후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으니..


영화는 밀라노의 상류층 재벌가로 시집을 온 엠마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어딘가 숨 막힐 듯한 분위기가 감도는 시아버지의 생일 파티가 치러지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엠마와 그의 아들 에도의 친구 안토니오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점점 그 관계가 발전되는 과정을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연출로 풀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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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 가문의 며느리로서 얼핏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엠마이지만, 그녀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답답함과 외로움으로 가득하다. 남편을 따라 고향인 러시아를 떠나 이탈리아 밀라노로 오게 된 만큼 의지할 친구도 없는 상황에서 세 자녀는 각자 미래를 위해 집을 나서고, 남편 탄크레디와의 서먹한 관계는 삶의 회의를 높여준다. 그런 만큼, 엠마는 남성적인 매력과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안토니오에게 이끌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족끼리 갖는 저녁 식사조차 누가 어느 자리에 앉을지 정해야 할 만큼 격식으로 가득 찬 레키 가문에 들어온 엠마는 꽉 끼는 옷을 입고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집안에 어우러지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한다. 그런 엠마에게 있어서 딸 베타가 동성 연인과 만나고 있음을 털어놓은 순간은 그녀에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수 있는 일종의 용기를 불어넣은 듯 보이는데, 이후 엠마가 안토니오와 만남을 가지면서 비로소 활기를 되찾게 되는 과정은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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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연출한 <비거 스플래쉬>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 또한 루카 구아다니노 특유의 연출이 큰 매력을 더한다. 감정이 분출되기 시작하는 과정의 묘사는 과감히 생략한 채 서정적인 분위기로 이를 대신하며, 동선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는 핸드헬드 촬영은 내적 변화를 갖는 엠마의 심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마치 고풍스러운 옛 문학 작품을 보는 듯한 감독만의 고급스럽고도 서정적인 연출은 어쩌면 그저 당황스러운 불륜 드라마처럼 느껴질 수 있을 소재마저 우아하고 아름답게 다가오도록 만든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을 마음껏 보여준 틸다 스윈튼은 이 영화에서 그녀만의 우아한 멋을 폭발적으로 뿜어낸다. 이듬해 개최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소한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어야만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엠마의 감정 변화를 놀라울 정도로 훌륭히 소화해 낸 그녀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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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강렬하게 귀를 찌르는 오케스트라 음악의 향연 또한 결말로 향할수록 더해가는 긴장감을 고조시켜주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이러한 음악의 힘과 틸다 스윈튼의 연기의 조화가 극대화되며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이 엔딩을 스크린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재개봉이 충분히 가치 있게 느껴질 정도로, 엔딩이 갖는 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정리하자면, 불과 6개월이 채 안 되어 다시 관람한 작품이지만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감정적인 울림을 크게 선사해준 작품이자 그때보다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현실에선 부딪히게 되는 욕구의 표출 혹은 분출을 대리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매력 중 하나라는 점에서 진정한 사랑, 진정한 자신을 좇는 엠마의 이야기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는 가히 놀라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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