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놈이 이토록 인간적일 줄은 미처 몰랐네.
개봉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영화 <베놈>을 관람하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화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엠바고 해제 이후 공개된 처참한 평가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아무런 감흥도 선사하지 못할 줄이야..
영화는 직업 정신이 투철한 열혈 기자 에디가 거대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에 대해 파헤치며 시작한다.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의욕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된 후 보잘것 없이 살아가던 에디는 우연한 계기로 외계 생물체 심비오트와 공생하게 되고, 자신을 베놈이라고 칭하는 심비오트의 강력한 힘에 사로잡혀 점점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캐릭터 베놈은 <스파이더맨 3>에서도 등장함으로써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들에게도 꽤 익숙한 캐릭터이다. 지나치게 많은 빌런이 등장한 그 영화에서 생각보다 미미한 활약을 한 채 퇴장을 한 만큼, 제목부터 <베놈>인 이 영화에선 얼마나 그 캐릭터가 인상적으로 다가올까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는데 결국 영화는 이러한 기대치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사악한 빌런일 것만 같던 빌런이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면모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나쁜 놈들만 모아놓은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가족을 무척 아끼는 사랑꾼들의 집합체였던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보며 느꼈던 당황스러움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베놈의 어마어마한 활약을 기대하고 본 영화에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오토봇과 디셉티콘 간의 대립을 재현하고 있으니 그저 황당할 따름.
익히 알려졌듯 본 영화는 북미에서 보호자 동반 하에 13세 미만도 관람이 가능한 PG-13 등급 판정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등급을 받기 위해 상당 부분을 편집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영화는 베놈의 활약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볼거리마저 놓치고 말았는데, 당장 또 다른 코믹스 원작 영화 <데드풀>이 R등급을 받고도 놀라운 흥행 수익을 기록한 만큼 이 좋은 소재, 이 좋은 캐릭터를 이다지도 매력 없이 소모하고 만 판단은 참 아쉬울 따름이다.
한편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을 지배하는 무엇인가에 의해 스스로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설정 탓에 자연스럽게 지난달 개봉한 <업그레이드>를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두 주연배우 또한 무척 닮았다.) 그리고 결국 이 영화 <베놈>을 보고 있노라면 <업그레이드>가 얼마나 깔끔하고 때깔 좋은 영화였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되며, 아마도 이는 이 영화를 먼저 봤었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그래도 국내에서도 인기가 상당한 배우 톰 하디의 다양한 매력만큼은 물씬 느낄 수 있는 만큼 그의 팬들이라면 그 점만으로도 제법 만족스럽게 볼 수 있을 듯하며, 그런 반면 믿고 보는 미셸 윌리엄스가 고작 이런 역할로 소모되고 마는 것은 참 안타깝게 다가온다. 내가 베놈이라는 캐릭터에게 기대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는 데에서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 한편, 본 영화보다 특전으로 받은 포스터나 엔딩 크레딧 때 삽입된 음악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것도 참 씁쓸할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