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돋보이는, 제법 매력적인 수사물.
개봉 직전까지 참 다사다난했던 영화 <암수살인>. 그다지 기대가 크지 않았으나 시사 이후 평가가 상당히 좋았던 터라 급 관심이 생긴 이 영화를 관람한 소감을 먼저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올해 현재까지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선 주저 없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고 싶은 작품이었다.
영화는 강태오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살인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강태오는 형사 김형민에게 자신이 죽인 사람이 총 일곱 명이라는 자백을 늘어놓고 형민은 그 어떤 증거도 없이 오직 태오의 진술에 의지한 채 추가 살인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한국 영화계에서 무분별하게 사람을 죽이는 연쇄 살인범이 등장하는 영화는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열 편에 달할 만큼 차고 흘러넘친다. 그중에서는 완성도 측면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는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극적인 장면 묘사로 살인을 전시하거나 결국 소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찝찝함만을 선사해왔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암수살인>은 그들과 달리 살인을 단순히 소재로 소비하지 않고 그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분명한 강점을 보인다.
영화는 우선 스토리를 진행해가는 플롯부터가 꽤나 참신하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에선 증거와 단서를 바탕으로 살인범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것이 주된 전개라면, 이 영화는 피의자가 수감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명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인 피의자가 형사에게 사실 자신이 더 많은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하고, 이를 들은 형사가 이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는 스토리라인은 무척 참신하게 다가오며 과연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궁금증을 고조시켜준다.
영화 속의 형사 형민도,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태오가 과연 왜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가'에 대해 온갖 추측을 펼칠 때쯤, 영화는 이에 대한 답을 던져주며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이때부터 형민은 더더욱 실제로 벌어졌을지조차 알 수 없는 살인,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희생자를 파헤치게 되는데 형민이 형사로서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바탕으로 수사를 이어가는 과정은 무척 흥미로운 한편, 일종의 감동까지 선사한다. 형민이 마땅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도 태오의 자백을 바탕으로 수사를 펼치는 가장 큰 이유는 억울하게 죽었을지 모를 희생자를 위함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만큼 희생자의 죽음을 전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는 더욱 높은 가치를 갖는다.
주조연 배우들의 호연 역시 영화 내내 두드러진다. 이미 <추격자>나 <극비수사>에서도 형사 역할을 연기했던 김윤석 배우는 이전과는 또 다른 우직함과 집요함으로 형민이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화해내며, 어쩌면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믿고 볼 수 있는 배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최근 김윤석 배우의 출연작은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만큼이나 무게감과 진중함이 느껴진다. 한편, 요즘 가장 활발히 활약 중인 배우 중 한 명인 주지훈 배우가 이 영화에서 선보이는 연기는 사이코패스 살인범 강태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압권이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두 배우 진선규와 문정희의 활약 역시 인상적이다.
영화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살인범과 형사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총격전이나 끔찍한 묘사 없이도 내내 긴장감을 자아내는, 그런 한편 확실한 주제의식을 통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여운을 선사하는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연스럽게 <살인의 추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엔딩 때문일지는 몰라도, <살인의 추억> 이후 등장한 실화 기반의 한국 수사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수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며, 더불어 아마 살인범이 등장하는 영화 중 가장 울림 있고 먹먹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ps. 희생자들을 그리는 진중한 태도가 무척 돋보이는 영화인 만큼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면서 유가족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국 유가족이 사과를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분명 아쉬움을 남기며, 영화의 이 오점이 앞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다른 영화들에게 일종의 본보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