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라는 주제와 복수극이라는 소재의 강렬한 조합.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안았던 그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관람하였다. 그야말로 어마무시했던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연출한 린 램지 감독의 신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케빈에 대하여>만큼이나 강렬하고 그만큼이나 쓸쓸한 여운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언제나처럼 어떤 내용인지 전혀 알아보지 않은 채 관람한 상황에서 영화는 시작 후 10여 분이 지나서까지 좀처럼 스토리를 파악할 만한 실마리를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과거의 어떤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는 듯한 한 남자의 쓸쓸함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낼 뿐이며, 관객은 이 불친절한 전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영화는 주인공 조의 직업과 성격을 투박한 듯 거칠게 묘사하며, 그에게 어떤 임무가 주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관객들의 흥미를 자아내기 시작한다.
전체 러닝타임이 90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상당히 간단하다. 청부업자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의뢰받은 일을 하던 중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맞이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만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는 것이 이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이다. 이러한 스토리는 자연스럽게 <레옹>이나 <아가씨>, 더 거슬러 올라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까지 떠올리게 만든다. 이외에도 고독한 킬러가 홀로 처절한 복수를 펼친다는 설정은 다양한 영화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조금은 전형적일 수 있는 스토리에도 불구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이 영화만의 확실한 개성을 갖춘다.
영화의 핵심 테마는 화끈한 액션도, 치열한 복수도 아닌 주인공의 트라우마이다.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생긴 트라우마부터 군인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얻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굴곡진 삶을 살아온 조의 삶은 그 어떤 의욕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함 그 자체이다. 더 이상 그 어떤 회복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삶에서 그는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결국 이를 해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그렇게 쓸쓸하기 짝이 없는 그의 삶은 의뢰를 받고 구출해낸 소녀 니나를 만나며 변화의 물꼬를 트게 된다.
청부업자가 악당들에 맞선다는 전개 상 자연스레 화려한 액션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가 악당들을 처치하는 과정에서 자극적인 장면의 묘사를 최대한 생략한다. 다시 말해 적지 않은 이들이 목숨을 잃음에도 불구 영화는 무척 절제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 점이 이 영화만의 특별한 개성을 극대화하는 가장 큰 포인트이기도 한데, 그런 한편 올해 <팬텀 스레드>로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 조니 그린우드의 강렬한 음악과 과거와 현재가 반복되는 속에서의 몽환적인 연출은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을 영화에 생동감을 더한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삶의 단조로움과 괴로움을 그대로 표출하던 주인공 조는 결국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한없이 처연하고 고독해 보인다. 그런 만큼 그저 무거운 마음으로 상영관을 나설 수도 있을 상황에서, 마지막 순간에 이 영화가 선사하는 한 줄기의 따사로운 빛은 어떤 면에선 무척 찬란하게까지 느껴진다. 스스로를 옭아매던 트라우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 듯한 조의 마지막 표정은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며 이는 다시 말해 조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의 놀라운 호연이 빚어낸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최소한 어떠한 이유로든 무척이나 고독하고 쓸쓸한 인물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연기는 가히 그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트라우마라는 소재를 효과적으로 다뤄낸 연출, 호아킨 피닉스가 보여주는 강렬한 연기, 그리고 쉽게 상영관을 뜰 수 없게 만드는 엔딩의 여운이 더해져 단순히 고독한 킬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또 한 편의 영화에 그치지 않은,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앞서 말했듯 불친절한 초반부 플롯 상 스토리를 파악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나 액션의 통쾌함이나 강렬함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다소 갈릴 우려 또한 충분히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