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샐린저의 생애만큼은 매력적으로 그려냈지만.
영화제 이후 조조 영화를 보는 게 오랜만이어서인지, 뭔가 굉장히 낯선 기분으로 관람한 오늘의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 제목에서부터 쉽게 예상할 수 있듯 [호밀밭의 파수꾼]을 집필한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이 영화만의 새로운 개성과 유사 장르물에서 익히 보아온 전형적인 전개가 어우러져 무난한 느낌으로 다가온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샐린저가 정신병원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로부터 6년 전으로 거슬러 가, 꿈 많은 작가 지망생이었던 대학생 샐린저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글을 써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던 샐린저는 콜롬비아대 베넷 교수의 조언, 사랑하는 연인 오닐의 충격적인 스캔들, 끔찍한 전장에서의 트라우마가 어우러져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영화는 장단점이 무척 명확하다. 먼저 장점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스테디셀러를 집필했지만 이후 더 이상 차기작을 내놓지 않은 채 은둔 생활을 한 작가 샐린저의 이야기 자체가 자아내는 매력을 흥미롭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샐린저가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초중반부의 전개, 참전 후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며 망가져가는 그의 모습을 통해 왜 그가 첫 장편으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이후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를 집중적으로 그려나가는 후반부의 전개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한 편의 매력적인 전기 영화로 다가오게 만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연 니콜라스 홀트의 인상적인 호연이 있다. <웜 바디스>, <엑스맨> 시리즈,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등 맨 얼굴을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연기 변신을 시도한 그는 이번 영화에서 '그가 이렇게나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나' 싶은 생각이 들만큼 작가 샐린저의 십 여 년간의 세월을 훌륭히 연기해낸다. 더불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각각의 인물들을 연기한 케빈 스페이시, 사라 폴슨, 조이 도이치 등 주조연 배우들 또한 각자가 맡은 캐릭터를 안정적으로 소화해내며 극에 몰입도를 높여준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특정 분야에서 훌륭한 재능을 보인 인물을 다룬 비슷한 전기 영화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한 기시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 분야가 무엇이든 자신이 잘하고 자신 있는 분야에 극도로 빠져들어 자신은 물론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괴롭히는 천재의 이야기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이미 너무 많이 제작되어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셜 네트워크>처럼 훌륭한 각본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거나 <이미테이션 게임>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한 방이 있다면 충분히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겠지만, 이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의 경우 비슷한 영화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작품을 이끌고 가는 깊이가 얕게 느껴지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다 보니 결국 영화는 크게 다뤄지지 않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이야기를 영화화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메리트를 자아내지 못하는 작품처럼 느껴지고 만다. 누구보다 작가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불탔던 한 인물이 다양한 사건을 겪으면서 점차 변모해가는 과정 자체는 무척 흥미롭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선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어딘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한 에피소드를 보고 나온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배우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한 니콜라스 홀트의 열연만큼은 무척 빛나는 만큼 그의 팬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럽게 관람할 수 있는 작품임은 분명해 보인다.
ps. 영화에는 지난해 성추행 스캔들로 할리우드를 들썩였던 케빈 스페이시가 등장한다. 그의 출연이 영화에 흥행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이 영화의 국내 홍보 문구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며 네이버 영화에서도 그는 출연 배우 중 16번째로 언급되어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는 니콜라스 홀트 다음으로 비중이 큰 배우이자 니콜라스 홀트와 함께 영화의 오리지널 메인 포스터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제아무리 성범죄를 일으킨 인물이 출연한다고 해도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을 이렇게 꽁꽁 숨기는 것이, 그런 탓에 그가 출연하는 사실을 모른 채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올바른 마케팅 방법인지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