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적인 역사가 남긴 묵직한 교훈.
서울독립영화제 시작을 앞두고 개봉작을 섭렵하기 위해 아껴뒀던 원데이 프리패스를 쓰게 된 오늘의 첫 영화 <국가부도의 날>. 최근 들어 CJ 배급의 시대극이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내놓았던 만큼 큰 기대를 갖고 관람한 이 영화의 소감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최근 CJ의 시대극은 승률이 8할 이상은 되는 것 같다고.
많이 알려져있듯 영화는 대한민국이 IMF 외환 위기를 맞이한 1997년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마치 지난해 말 개봉한 <1987>처럼 각기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옴니버스 구성으로 교차되며 펼쳐지는 이 영화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나라의 위기를 직감한 금융맨 윤정학, 작은 공장의 사장 갑수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다루는 방식을 통해 점점 위기를 향해가는 나라의 모습을 서늘하면서도 매끄럽게 그려나간다.
1997년 말 잇따른 위기 속에서 끝끝내 IMF의 손을 빌리게 된 후 이듬해까지 전국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이 펼쳐졌던 나라의 모습은, 당시 일고여덟 살의 나이였던 나에게도 꽤나 생생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나라가 얼마나 큰 위기에 직면해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여겼을 당시의 나에게,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때 그 사태에 대해 구태여 자세히 알아보려 애쓰지 않은 나에게 이 영화는 꽤나 묵직한 무언가를 던져준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세 가지 이야기가 교차 편집을 통해 펼쳐지지만 결국 이 영화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과 재정국 차관의 대립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는 징조가 보일 때부터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한다는 한시현과 다른 속내를 갖고 나라의 위기 상황을 철저히 비공개로 해야한다는 차관의 대립은 영화 내내 서늘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이후 한시현이 맞이하는 답답한 상황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말해 이 영화는 한시현 팀장을 연기한 김혜수 배우의 영화이기도 하다. 작품들에서 왠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우라를 자아내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 온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 나라의 위기를 막기 위해 애쓰는 냉정하고도 주체적인 인물을 훌륭히 소화해낸다. 표정, 행동, 대사 그 모든 면에서 가히 놀라운 몰입감을 선사하낸 그녀의 연기는 이 영화의 무게감을 지탱하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다가오며, 그녀를 비롯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를 활용한 방식 역시 무척 의미있게 다가온다.
IMF 외환 위기를 직면했던 누군가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마주하기 싫어 이 영화의 관람을 망설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영화는 그 당시 괴로워하고 아파한 이들에게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며 후반부에 이르러 눈시울이 붉어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IMF 외환 위기 이후 20년이 흐른 시점에서 왜 그 사건을 영화화했는가가 비로소 드러나는 에필로그는 굉장히 묵직하고도 진중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때 이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지도 모를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국민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가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드러나는 후반부는 이 막막한 현실을 참 씁쓸하게 느끼게 하는 동시에 강한 울림을 선사한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지난 해 <1987>이 그랬던 것처럼 한 해의 마무리를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관객들에게 어떤 자극을 선사해줄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자, 한 편의 시대극으로써 충분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단순히 김혜수 배우와 조우진 배우를 주축으로 한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러닝타임 내내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할 것이라고도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유아인 배우가 연기한 윤정학이라는 인물을 영화 내내 꼭 존재해야 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질 정도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