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시호일>

따뜻한 기운을 물씬 안겨주는 매력적인 영화.

by 뭅스타

19.01.18. @CGV평촌


어차피 볼 영화 빨리 보자는 생각으로 아침 일찍부터 영화관으로 향해서 관람한 오늘의 영화 <일일시호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수많은 작품에서 만났던 배우 키키 키린의 유작이 되어버린 이 영화는 뭐랄까, 분명 특별한 무언가는 없음에도 보는 내내, 그리고 상영관을 나선 후에도 괜시리 마음 한 편에 깊게 스며드는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매사에 조심스러우면서도 덜렁대는 성격의 노리코가 사촌 미치코와 함께 다케다 선생의 다도 수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자세 하나 하나에 정해진 규칙이 있는 만큼 어렵고 복잡하기만 한 다도 수업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수시로 실수를 반복하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반복되는 수업을 통해 노리코는 점점 삶의 여유와 안정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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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 영화에는 이렇다 할 만큼 뚜렷한 스토리나 기승전결의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노리코가 결혼을 앞두고 애인에게 배신당해 좌절하는 과정이나 이후 새로운 남자와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과정들도 펼쳐지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생략된 채, 영화는 오로지 수십 년에 걸쳐 다도 수업을 듣는 노리코와 그녀에게 정성스레 다도를 가르치는 다케다의 모습이 차분하게 펼쳐질 뿐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특별한 무언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한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이제 막 스물에 접어든 노리코가 그로부터 24년이 흐른 시점에 이르기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되는 다도 수업을 들으며 점점 성장해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는 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안겨주며 다도를 배우는 과정 하나 하나를 몰입해서 바라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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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영화는 전개 과정 속에서 인물들의 대사나 노리코의 내레이션을 통해 제법 곱씹어볼만한 메시지를 불쑥 불쑥 던져준다. 당시에는 미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 남다르게 다가온다는 것, 살면서 어떤 것을 반복해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라는 것 등 어쩌면 조금은 상투적일 수 있는 메시지는 편안하고 여유로운 영화의 분위기 속에서 제법 마음 속에 깊게 스며들며, 아마 앞으로도 살아가며 한번씩 영화의 장면들과 함께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


굉장히 정적이고 차분한 다도라는 예법을 소재로 하는 만큼 자칫 그저 지루하고 힘겹기만 한 러닝타임으로 다가올 수 있는 영화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대비를 이루는 경쾌한 멜로디의 음악과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유머를 통해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활력도 선사한다. 또한 갓 대학교에 입학한 노리코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이런 저런 도전에 실패하고 좌절하는 과정은 어쩌면 지금의 내가 겪고 있는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기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더욱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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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후반부에 이르러 이별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만큼 이 영화가 키키 키린의 유작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앞으로도 이 영화를 비롯해 그동안 숱하게 만나온 다른 영화들에서처럼, 관록이 느껴지는 인생의 선배이자 수많은 희노애락을 겪은 한 인간으로서 다양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녀를 더이상 새 작품으로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영화 속 그녀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더욱 씁쓸하고 안타깝게 다가온다.


<립반윙클의 신부>를 필두로 다양한 작품에서 만나온 쿠로키 하루의 한결 내공이 느껴지는 연기와 자연의 풍경을 담아낸 여러 인서트 컷도 제법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물론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몰라도 이 영화를 보고 난 지금 당장의 마음대로면 한동안 조금이라도 여유있고 차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물씬 들기도 한다.


바람 소리, 빗 소리, 그리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작은 소음들까지도 괜시리 이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다가올 것만 같은 생각이 밀려오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남다른 매력을 안겨주고 살아가며 한 번씩 꺼내보고 싶은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영화의 정서 상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 같지만, 하시모토 아이 주연의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인상깊게 본 이들이라면 분명 큰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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