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석이라는 섬세한 '감독'의 발견.
19.04.11. @CGV평촌
두 편의 신작을 연달아 관람할 예정인 오늘, 첫 영화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인 김윤석의 연출 데뷔작 <미성년>을 관람하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배우라고 해도 감독으로선 아쉬운 작품을 내놓았던 경우가 많은 만큼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관람한 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김윤석이라는 배우가 보여준 이미지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이야기를 탁월하게 풀어내는 방식이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었달까.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작품인지는 초반부터 명확히 드러난다. 동급생 주리와 윤아가 그들 각자의 아빠와 엄마가 불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이상 숨을 곳도, 숨길 것도 없어진 두 가족의 실로 복잡하면서도 다이나믹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는 불륜의 당사자인 어른이 아닌 두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를 풀어나간다.
더이상 신선함을 자아내지 못하는 불륜을 소재로 하면서도 이 영화가 이전에 보지 못한 색다른 매력을 선사하는 것은 어른들의 문제에 의도치 않게 엮이게 된 두 소녀 주리와 윤아를 중심 인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영화의 제목은 <미성년>은 의미 그대로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두 고등학생을 뜻하는 동시에 나이는 성인일지라도 성인답지 못한 이들을 의미하는 뜻하는 것처럼 다가오는데, 어른들이 벌이고 제대로 수습하지 않는 문제에 능동적으로 나서는 두 소녀의 여정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히 생각할 수 없었을 만큼 섬세하다는 점이다. 불륜의 주체이자 연출을 맡은 김윤석 배우가 직접 연기한 대원이라는 캐릭터는 철저히 부수적인 존재로 밀려난 가운데 영화는 두 가정의 엄마 영주, 미희와 그들의 딸 주리, 윤아가 눈 앞에 닥친 상황을 마주하고 대처하는 과정을 리듬감 있게 풀어낸다.
다시 말해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이 중심이 되는 상황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 상대 캐릭터와 호흡을 맞추는 과정은 지극히 감성적인 일본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만큼 섬세하고 안정적이며 매력적이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의 감독이 남성 감독이라는 사실이, 그것도 다름 아닌 김윤석 배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사 하나 하나까지 탁월하고 수려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어쩌면 스토리 자체는 마냥 새롭다고 할 수 없을 영화에 더욱 힘을 더하는 것은 배우들의 호연이다. 연기로는 두 말 하면 입 아픈 염정아, 김소진 배우부터 김희원, 이상희, 이희준, 염혜란 등 적은 분량으로 등장하는 배우들까지 각각의 캐릭터를 소화한 이들이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며 극에 잘 녹아드는 상황에서 핵심이 되는 두 소녀를 연기한 김혜준, 박세진 배우는 올해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연기로 극을 사로잡는다. 특히 [킹덤]에서의 연기로 혹독한 평가를 받았던 김혜준 배우의 활약은 새삼 놀랍다.
불륜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는 만큼 자칫 무겁게만 흘러갈 수도 있을 영화의 적재적소에 삽입되어 있는 유머도 극의 리듬감을 더해주는 효과를 낳으며 감정적인 호소를 최대한 배제한 채 엔딩까지 리듬감을 이어가는 연출력도 무척 탁월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치기에서 비롯된 하나의 해프닝으로 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직간접적으로 겪는 이들의 감정 변화나 결국 그것이 초래한 결과까지 인상적으로 다뤄내며 찝찝한 뒷맛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도 돋보이는 장점이다.
할리우드에는 당장 작년의 <레이디 버드>나 <스타 이즈 본>처럼 배우 출신 감독들의 훌륭한 영화가 종종 선보여 왔지만 국내 상업 영화에 한해서는 어쩐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상황에서 이 영화는 이미 배우로선 더할 나위 없는 자리에 오른 김윤석이라는 사람이 감독으로서 앞으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큰 기대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한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욕심이 너무 많아 보였던 박중훈 감독의 <톱스타>, 연출과 주연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 듯한 하정우 감독의 <허삼관>과 달리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면서도 이를 오랜 시간 배우로 활동해 온 '감독'의 시각으로 훌륭히 그려낸 이 작품의 미덕과 매력은 놀라운 반전이자 인상적인 발견처럼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