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그들과 토론하고 싶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
19.05.16. @CGV평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퍼스널 쇼퍼> 등을 연출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신작 <논-픽션>을 관람했다. 전작 <퍼스널 쇼퍼>가 국내외 많은 평론가와 관객들의 호평에 비해 개인적으론 다소 난해하고 힘들게 느껴졌던 만큼 기대와 걱정이 공존했던 이 영화는, 영화 내내 펼쳐지는 인물들 간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느껴진 작품이었다.
출판사 편집장 알랭과 그의 친구로 보이는 작가 레오나르의 대화로 시작하는 영화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날마다 조금씩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듯 하다. 알랭과 셀레나 부부, 레오나르와 발레리 부부, 그리고 알랭과 은밀한 관계를 키워나가는 로르까지, 다섯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107분간 쉴새없이 터져나오는 논쟁에 자연스레 함께 동참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영화의 영제와 국내 제목 모두 <논-픽션>이지만, 보다 영화의 의미를 크게 내포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 원제인 <Doubles vies> 즉 <두 개의 삶>처럼 보인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저마다 종이책과 E북의 경계,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배우로서 겪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 등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냐에 따라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두 개의 삶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물론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이들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반복하는 끝에 결말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 나름대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는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극영화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식 플롯과는 결을 달리 한다. 그러한 일반적인 스토리 구성대신 과연 전체 시나리오 분량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할 만큼 온갖 토론과 논쟁이 연이어 펼쳐지는데, 그런 만큼 자칫 산만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을 영화는 그들의 대화 사이에서 드러나는 미묘한 긴장과 때아닌 유머가 내내 흥미를 유지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이들의 논쟁이 마냥 동떨어진 대화가 아닌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 저마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인지 모른다. 편집장 알랭이 전자책에서 E북으로 주요 플랫폼이 변화할 것을 대비하고 예측하는 것은, 이를 책이 아닌 영화로 바꿨을 때 최근 시상식 노미네이트 등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극장 영화 시대에서 스트리밍 영화 시대로의 변화와도 직접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데, 과연 어느 것이 진정 옳은 정답이라고 흔쾌히 말할 수 없는 것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들의 토론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한편, 자신의 소설에 실제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삶을 투영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대한 논쟁을 낳은 작가 레오나르의 이야기도 과연 어디까지가 옳고, 어디까지가 그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매력적인 주제로 느껴진다.
정리하자면, 4차 혁명 시대라고 불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변화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계속해서 자문하는 듯한 감독의 고민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처럼 다가온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이들의 모습, 그리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듯이 살아가지만 누군가에게 쉽게 터놓을 수 없는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은 앞서 말했듯 이를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흥미롭게 느껴지며, 더 나아가 이들의 토론에 동참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순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더불어, 주요 배우들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 그리고 앞선 두 작품과는 결이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는 감독의 새로운 스타일을 체험하는 재미 또한 꽤나 크게 느껴지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