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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Dec 05. 2020

비교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삶 #2-1.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명료한 문체로 쓰인 에세이 형식의 책이다. 문유석 판사는 이 책에서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는 한국사회의 집단주의적 문화, 수직적 가치관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꼰대가 넘치는 세상, 쓸데없이 남에게 관심이 넘치는 속물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비교, 물질주의, 위악적 공격성, 눈치와 체면, 뒷담화, 패거리 정서, 위계질서, 장유유서, 강요된 겸손 제스처와 모난 돌 정 맞기, 다구리, 남 잘되는 꼴을 못보는 공격적 열등감, 관행. 이런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집단주의 문화와 그것에서 비롯한 수직적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수직적 가치관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획일화되어 있고, 한 줄로 서열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학벌, 직장, 직위, 사는 동네, 차종, 애들 성적…… 삶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남들 눈에 띄는 외관적 지표로 일렬 줄세우기를 하는 수직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논리상 한 명도 있을 수 없다. 그 모든 경쟁에서 모두 전국 일등을 하기 전까지는 히딩크 감독 말처럼 늘 ‘아직 배가 고플’테니 말이다. 모두가 상대적 박탈감과 초조함, 낙오에 대한 공포 속에 사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타인에 대한 관용 부족으로 이어져 약자혐오와 위악적인 공격성을 낳는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는 문화, 집단 내에서의 평가에 개인의 자존감이 좌우되는 문화 아래서 성형 중독, 사교육 중독, 학력 위조, 분수에 안 맞는 호화 결혼식 등의 강박적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사실 이건 모두 같은 현상이다.


마치 인간의 본성에는 비교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는 듯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는 더욱 진하게. '학벌, 직장, 직위, 사는 동네, 차종, 애들 성적... 삶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남들 눈에 띄는 외관적 지표로 일렬 줄세우기를 하는 수직적 가치관.' 우리는 비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걸까. 


고백하자면, 나 역시 많은 것들을 비교해왔다.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강한 편이었고, 경쟁에서는 항상 이기고 싶었다. 뭐든 다 잘하고 싶었다. 삶을 수많은 사다리의 집합으로 여겼다. 학창 시절 내게 가장 큰 사다리는 아마 성적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뭘까. 돈? 외모? 그 비교의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그 사다리의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었다. 어쩌면 아직도 그런 수직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는 비교나 열등감이 건강하게 사용된다면, 발전을 위한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경우에 우리는 비교로, 열등감으로 스스로를 불필요하게 괴롭힌다. 비교는 행복의 적이다.


수직적 가치관에 빠져 세상을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사다리로 보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발버둥쳐서 사다리의 위로 위로 올라간다고 해도 그 위에는 반드시 누군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돈을 번다고 해도 내가 이재용보다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이재용 입장에선? 이재용도 빌 게이츠보다는 가난하다.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재용이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지 하며 빌 게이츠와 비교를 하며 우울해할까? 또 내가 아무리 운동을 하고 성형을 한다고 해도 차은우보다는 못났을 것이다. 학벌은? SKY 서성한 중경외시에 그 위로는 북경대 동경대 그 위에 아이비리그 하버드에 예일에 프린스턴에 하버드 학사로 들어가면 석사가 있을 것이고 박사가 있을 것이고 박사는 논문 개수로 또 따지나? 어떤 기준인가? 교수는 어디가 됐을 것이며 얼마나 걸렸는데... 비교를 하자면야 끝도 한도 없는 거다. 결국 나에게 금메달을 걸어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읽은 집단주의 문화와 수직적 가치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저자인 문유석 판사는 판사들의 수직적 가치관에 대해 관찰할 일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우와 할만한 사회적으로 대단히 존경받는 직업인 판사들도 비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사시를 붙고 나서 사법연수원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법관이 된 사람들도, 그 안에서 서울대 출신이냐 아니냐, 서울대 안에서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냐 비법대 출신이냐, 서울대 법대 출신 중에서도 졸업 전에 사시를 붙었느냐, 아니냐. 법관이 되고 나서는 소위 경판(서울 판사)이 되느냐 마느냐.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느냐 마느냐... 이런 것들로 그 안에서도 비교를 한다고 한다. 충분히 대단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인스타를 보며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삶은 화려하고 완벽한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도 당연한게 인스타에 보여주는 겉모습은 자신의 가장 좋은 순간들만 선별된 거니까. 하지만 껍질을 걷어내고 보면, 결국 사람은 다 똑같다. 반쯤 차있고 반쯤 비어있는 것이 인간이다. 네가 부족한게 있으면 나도 부족한게 있다. 네가 잘난게 있으면 나도 잘난게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나이 중시한다. 만나자마자 굳이 나이부터 묻고 서열을 정하고, 존댓말 여부를 따진다. 존대를 하냐 마냐로 끝나면 다행인데, 나이 별로 적합한 삶의 궤적을 정해둔다. 마치 인생에 정답을 보여주는 직선 모양의 궤도가 있고, 그 궤도를 벗어난 인생은 오답인 것처럼. 어느 나이에는 대학교를 가야 하고 가급적 재수 삼수보단 현역이 좋고 칼졸해서 어떤 직장 정도는 들어가 줘야만 옳으며 돈은 어느 나이 정도면 얼마는 저축을 해놔야 하고 몇 년 차면 대리승진 몇 년 차면 과장승진. 우리나라엔 우습게도 '결혼적령기'라는 말이 있다. 결혼에 적령기가 어딨어 그냥 결혼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그래. 결혼 적령기에 어느 정도 '수준' 맞는 사람과 결혼해서 애는 언제쯤 낳고, 유치원은 어떤 데가 좋고 학군은 어디로 보내야 해. 학원은 요러요런거 정도는 다녀줘야 하고... 노후 준비는... 이대로 살면 그게 인간이야? 붕어빵이지. 그것도 틀에 완벽하게 맞는 붕어빵이 몇이나 될까. 우리 삶은 다 자투리가 조금씩은 삐져나온 못난 모양이다. 싹 다 불행한 붕어빵 인생들 같으니라고. 묘비를 붕어빵 모양으로 만들까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비교는 행복의 적이다. 수직적 가치관에 빠져 세상을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사다리로 보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삶의 준거 기준은 결국 나에게 두어야 한다. 결국 나에게 금메달을 걸어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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