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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Nov 11. 2020

말 것: 건강한 자책은 있을 수 없다

어제보다 잘 쓰는 법_72일 차

'고작 이거밖에 못 쓰다니….' 애써 글 한 편을 완성했으나 마음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 기대를 밑도는 그 원고를 이곳저곳 고쳐봐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때마다 유심히 살피는 것이 있다. 바로 스스로 자책하고 있진 않은지 자문하는 것. 자책은 마땅히 배출해서 순환시키고 허공에 흩트려야 할 부정적인 감정을 나가지 못하게 틀어막는다.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고 그 위를 자기감정이 타고 돌다가, 결국 감정 안에 자신이 갇히도록 만든다. 이쯤 되면 무언가 쓸 의욕이 사라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기록은 정보를 박제하는 일이다. 정보란 필자의 지식, 경험뿐 아니라 감정도 포함된다. 감정을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맴돌게 하는 자책이 글쓰기에 독이 되는 이유다. 


여기서 반성과 자책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요컨대 향후 계획이나 행동, 마음가짐이 확립된다면 전자이지만 자신에 대해 맹목적으로 비난만 한다면 후자다. 건강한 반성은 있어도 '건강한 자책'은 있을 수 없다. 예외가 없는 역설이다. 따라서 나는 보편적인 필자로서, 그러니까 직접 쓰는 글에 일말의 책임감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책을 터부로 삼는다. 


누군가 그랬다. 부정적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여러 번 부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가라앉는다고. 참신한 시도라는 점에서만큼은 높이 사지만 사실 나는 지금껏 이 방법의 효능을 제대로 느낀 적이 없다. 이미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을 뿐더러, 작명소 관계자가 아닌 나는 수시로 드는 부정적인 감정에 분주하게 수십, 수백 개의 이름을 붙일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솔루션은 지금 드는 감정을 인지하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지금 자책하려고 하네'라고 말할 법한 순간을 포착하면 속수무책으로 자책의 늪에 빨려 들어가는 꼴을 면할 수 있다. 나아가 조금 뻔뻔해진다면 자책을 오기로 옮길 수도 있다. 길지 않은 글밥 인생이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글쓰기에서 뻔뻔함은 미덕이라고. 앞으로도 죽 그럴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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