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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Nov 22. 2020

할 것: 글로 인한 고통에 집중해본다

어제보다 잘 쓰는 법_83일 차

오래도록 마음에 새긴 문장을 하나 소개한다.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한 구절이다. 저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나는 쓰는 것이 괴로울 때 이 말을 떠올린다. '괴로워야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의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보상 심리를 채워주는 느낌이다. 나아가 실제로 글을 쓰며 지금 내가 괴로운 이유를 찾는 데 집중하다보면 당장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나'라는 필자와 더불어 내가 빚은 글이 어떤 녀석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보통 나는 스스로 공감하지 못하는 내용을 쓸 때 괴롭다. 꼭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양심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메시지는 촘촘한 논리에서 나오고, 그러려면 생각을 왜곡없이 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건너뛰고 아직 내 생각이 되지 못한 남의 말과 글을 잇대어 쓰려니 몰입감이 떨어지는 글이 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내가 쓴 정보성 칼럼에서 이런 경향이 종종 나타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사보 기자이지 발행인이 아니다. 따라서 사보는 나의 진정성보다는 정보의 유용성이 필요한 매체다. 두 요소가 양립하면 좋겠지만 대부분 무게중심은 후자로 쏠리게 마련이다. 또 모두가 합의한 기획에 나의 고집 어린 솔직함이 균열을 내선 안 된다.


여기까지 글쓰기에서 느낀 고통에 집중한 결과다. 필자에게 잘 써지고 독자에게 잘 읽히는 문장이 마땅히 갖춰야하는 조건과 매체의 속성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늘 고통을 파헤치라고 권하는 건 결코 아니다. 마감과 공생하는 이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모든 필자에게는 한번쯤 써야 할 양에 비해 남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 닥쳐온다. 이때 '지금 내가 왜 괴롭지?'로 시작한 상념이 커져버리면 쓸 말도 못 쓰고 만다.


그러니 생각은 적당히. 타이핑은 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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