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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Aug 09. 2020

딱 겪은 데까지만 쓴 이야기

글파도(글밥 먹는 노동자의 파이썬 도전기)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 사이에는 '칸막이'가 있다고 믿었다. 외골수까지는 아니어도 그 경계를 고수하는 게 주체적으로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업에 호불호를 가리는 게 철부지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랬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코딩을 싫어하다 보니, IT 전공생을 거쳐 뜬금없이 사보 기자가 됐다. 업을 가진 후 많은 사람을 만나면 유연해진다던데, 수백 명의 인터뷰이를 만났음에도 이 아집은 잘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터뷰이가 지금 위치에 있기까지 어떤 선택을 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체념했는지 함부로 재단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한 얕고 좁은 견해였다.


사보 기자 일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달마다 내가 직접 기획하고 쓴 글을 보드라운 지면으로 옮기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라고 자부한다. 또 원한다면 만나고 싶은 유명인을 섭외해 2시간 정도 인터뷰 겸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2018년 5월호 필자란에 처음으로 적힌 내 이름을 확인했을 때 혼자서 좋은 데뷔전을 치렀다고 혼술을 하며 자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2년 차에 접어들자 업무뿐 아니라 일에서 느끼는 설렘마저 적응돼버려, 여지없이 무료해지는 순간이 잦아졌다. 그토록 좋아하는 일이 골고루 포진해있다고 믿었던 직업이 지루해진다면 어떤 것도 즐겁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내 칸막이가 점점 한쪽으로 쏠리면서 하고 싶은 일의 영역을 밀어내는 시기가 찾아왔다. 밀어내는 데 속도가 붙자 무기력이 들이닥쳤고 언제나 그렇듯 우울감을 동반했다. 몇 달 동안 생각도, 활력도 모두 꺼둔 상태로 지내다가 문뜩 어이없는 다짐이 생겼다.


'코딩을 다시 해볼까….'


머릿속 말은 누가 들여다보지도 못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부끄러웠다. 강하게 주장하던 바가 한순간에 꺾였을 때 드는 머쓱함이랄까. 돌이켜보면 일을 하며 자연스럽게 코딩을 떠올린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가령 '150여 권의 과월호를 검색할 수 있는 서치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을 텐데' '고객사의 뉴스를 모아서 볼 방법은 없을까?' 등이다. 잠깐씩 떠올랐으나 애써 외면해온 상념들이 모여 마침내 완성된 문장으로 맞춰진 것이다. '코딩을 다시 해볼까….'


원래 마음을 정하면 거침없이 추진하는 성격이다. 곧바로 2달 교육 과정을 신청했다. 코딩 언어인 파이썬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당시 코딩을 배우는 게 학부생 때의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배움의 쓸모를 인지한 상태였다는 것. 오랜만에 본 탓에 생소하기까지 한 명령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맞춰가며 프로그램을 짰다. 이것이 내가 업무에서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이라고 여기니 희열마저 느껴졌다. 새벽잠을 줄여가며 몰두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내 삶에서 코딩이 제자리에 있지 못한 채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구분하는 기능을 상실한 칸막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현재 이 과정을 브런치에 '글파도'라는 이름으로 연재 중이다. 글파도는 '글밥 먹는 노동자의 파이썬 도전기'를 줄인 말이다.


언젠가 별자리를 보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규칙을 갖춰 떠 있는 별들을 인간이 제멋대로 묶어서 '천칭'이니, '전갈'이니 함부로 이름을 붙인다면 별이나 외계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구석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내가 만든 칸막이가 별자리와 진배없다는 생각을 뒤늦게 해본다. 호불호 따위에 갇혀 나의 가능성을 억누른다면 더없이 분할 것 같다.


끝으로 스스로 인지하기 위해 칸막이의 정체를 굳이 요약하자면 '자신에 대한 편견' 정도가 되겠다. 하루에도 무수한 생각과 경험이 엮이는 일상에서 나는 또 언제 칸막이를 세워둘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존재를 기민하게 파악하며 극복해갈 때 나답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겪어본 바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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