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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Oct 05. 2020

말 것: 틀리지만 편한 말들

어제보다 잘 쓰는 법_35일 차

군 시절, 산에 텐트를 치면 꼭 해야 하는 작업이 있었다. 비가 오는 상황을 대비해 텐트 주변 땅을 파서 배수로를 내는 것. 여기에 빗물이 모이면 물줄기가 점점 두꺼워졌고, 마른 흙을 적실수록 물길은 견고해졌다. 그 장면을 멍하니 보다가 잠시나마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잊히곤 했다.


추석날 아침, 아버지 말씀을 듣고 느닷없이 이제는 팔 일도 없는 배수로가 떠올랐다. "공항동에 언제 갈까?" 공항동은 김포공항 근처에 있던 외가댁을 가리킨다. 외할아버지댁이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신 지 3년이 다 돼감에도, 아버지에게는 처가가 아직 '공항동'이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30년 넘게 불러온 이름을 바꾸시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오랜 시간 '처가는 공항동'으로 통하셨을 테니. 마치 배수로를 탄 빗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던 곳으로만 흐르려 했던 것처럼. 물론 우리 가족에게 변함없이 정겨운 '공항동'이라는 이름을 굳이 바꾸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사용 중인 내 패스워드에도 '배수로'가 나 있다. 문자열 중 어릴 적 소위 '덕질'했던 가수가 등장한다. 이제는 콘서트 티켓이 생긴다 해도 가지 않을 만큼 관심이 식었음에도, 여전히 그 사람은 나의 온라인 계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처럼 말 곳곳에 스민 배수로의 흔적이 글에서 나타날 때가 있다. 굳어진 인식이 잘못된 정의로 드러나는 경우다. 사보 업계에서는 아직 '대지바리'라는 말을 쓴다. 지금처럼 고성능 편집 프로그램이 없었던 시절, 디자인 작업 시 실제 사이즈 종이 위에 접착제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조각조각 이어붙여 배치하는 작업을 뜻한다.


요즘은 다르다. 인디자인으로 간편하게 배치한 뒤, A3 용지에 두 페이지씩 인쇄한다. 수정이 필요하면 펜으로 간단히 표시해 다시 뽑으면 그만이다. 확실히 대지바리라고 하기에는 대부분의 과정이 빠졌다. (일단 풀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지바리는 '대지바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글은 생각을 박제한다. 써두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남는다. 말에서는 그럭저럭 허용되는 단어가 글에서는 엄격해야 하는 이유다. 은연중에 파버린 배수로가 실체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몰지 않도록 다지는 일. 글을 쓰며 스스로 익숙함을 경계하는 방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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