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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Oct 25. 2020

할 것: 변기 뚜껑을 열고 느낀 점

어제보다 잘 쓰는 법_55일 차

혹시 무언가를 먹으면서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있다면 미리 사과하고 싶다. 군 시절 중 몇 안 되는 뿌듯한 기억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중대 화장실은 80여 명이 이용했다. 시설이 워낙 낡아서 배수가 원활하지 않았다. 적어도 하루에 3번은 청소해야 악취를 잡을 수 있었다. 주마다 배정되는 담당 구역이 화장실로 정해지는 날에는 일주일간 비위가 상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 와중에 혼자서 변기를 고친 적이 있다. 청소를 하는데 세 번째 변기의 레버를 내렸음에도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보통 레버를 내리는 순간 걸리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걸리는 느낌이란 커버 뒤편의 수조에 담겨있던 물이 한 번에 쏟아지며 무게감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그날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내려봐도 힘없이 까닥거리기만 할 뿐. 결국 원래 흰색이었을 누런 수조 뚜껑을 열어야 했다. "으" 소리가 절로 났다.


물은 어느 정도 차 있었다. 그 상태에서 레버를 다시 내려 보니 문제가 보였다. 레버와 수조 밑바닥의 배수로 뚜껑을 연결하는 체인이 끊겨 있었던 것. 아마 적잖이 삭았던 모양이다. 문제를 파악한 나는 체인을 짱짱한 노끈으로 대체했다. 영구적이진 못해도 1년 이상은 거뜬히 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레버를 내렸다. 일부러 노끈 길이를 딱 맞게 조절한 덕분에 배수로 뚜껑이 제법 힘차게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세찬 물살이 쏟아 내렸다. "됐다!"라고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몇몇이 구경을 왔다. 나는 오래된 변기를 수리하는 요령을 알려줬다. 나름 실용성을 갖춘 생생한 강의였다고 자부한다. 이후 며칠간 변기 수리에서 드러난 알량한 재능을 전역 후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글쓰기에 '싫어하던 것을 싫지 않도록 만드는 기능'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마취 효과랄까. 비록 글을 쓰는 시간 동안만 활성화되는 기능이지만. 글쓰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을 떠오르는 대로 적자면 책임감, 생존 본능, 용기, 월급 등이 되겠다. 이 중에서도 마음은 제멋대로이고, 월급은 CEO 마음대로다. 결국 글쓰기는 내가 아는  가장 쉽게 접근할  있으면서도 효과가 보장된 수단인 셈이다.


다시 그때 화장실로 시간을 돌려보자. 만약 내가 '변기 수리'에 대한 칼럼을 쓰려고 하는 상황이었다면? 노끈, 강력 고무줄, 분리된 전선, 전투화 끈까지 모아놓고 내구성과 안정감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체인을 연구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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