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터의 일
축구에도 공격수와 수비수가 있듯, 기업 커뮤니케이션에도 공격과 수비가 있다. 좋은 일을 알려야 할 때는 공격, 반대의 경우에는 수비. 공격수는 기업의 홍보, 브랜드, 마케팅팀 모두 가능하지만, 수비수는 홍보에서만 가능한 포지션이다. 기업 커뮤니케이션실의 존재감은 기업에 이슈가 있을 때 가장 크게 드러난다는 홍보인들의 웃기고도 슬픈 농담이 그래서 나온다.
부정 이슈를 잘 막는 일은 긍정 이슈를 잘 알리는 일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골을 못 넣으면 무승부로라도 끝날 수 있지만, 상대방의 골을 막지 못하면 무조건 실점이기 때문이다. 수비를 잘하지 못하는 기업은, 아무리 공격을 잘해도 기업의 이미지와 명성(reputation)에 해를 입힌다.
그렇다고 홍보실이 모든 이슈와 위기를 원천 봉쇄 할 수는 없다. 결국 홍보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대응 메시지를 전략적으로 수립하는 일이다. 촘촘한 논리로 무장한 대응 메시지는 위기로 번질 수 있는 이슈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이미 발생한 위기의 불씨가 더 큰 화재로 번지지 않도록 소화기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작 11년 밖에 PR을 안 한 나는 여전히 수비가 어렵지만, 혹시라도 혼자서 외롭게 수비 전을 치러야 하는 작은 기업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들을 위해, 대응 메시지 수립 시 기준으로 삼고 있는 나의 방법들을 정리해 봤다.
좋은 재료가 좋은 음식을 만든다. 이슈가 발생했다면 해당 이슈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유관부서의 담당자를 찾아, 메시지 수립에 필요한 재료를 빠짐없이,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일종의 팩트체크를 하는 셈인데, 이때 중요한 것이 홍보 담당자의 질문이다. 이슈가 발생하게 된 경위에 대해 협업에서 큰 흐름을 확인해 주면, 홍보 담당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때만큼은 '내가 기자다!'라는 생각으로, 미디어에서 궁금해할 법할 내용을 예측해 질문하고, 현업의 추가 답변을 통해 이슈를 입체적이고 깊숙하게 파악해야 한다. 요리사의 손안에 재료가 풍부해야 어떤 요리를 대중에게 내놓을 수 있는지 다각도로 고려해 볼 수 있다.
현업에서 확인한 팩트를 바탕으로 이슈의 특성을 파악해 본다. 메시지의 초안을 구체적으로 잡기 전, 메시지의 방향성을 가늠해 보는 작업이다. 이슈의 책임(진원지)이 어디에 있는지, 잠재 이슈인지 이미 불이 붙은 이슈인지, 대응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건인지 아니면 최대한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상황을 주시해야 하는 건인지 등을 판단해 보는 것이다. 이 판단이 서야 메시지 수립에 관여해야 하는 의사결정권자들을 결정할 수 있다. 대다수의 메시지는 홍보실 수장의 컨펌을 받고 나가지만, 어떤 메시지는 경영진, 나아가 대표의 의사결정까지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슈의 특성을 파악할 때,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이슈들과의 연결고리를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단일 이슈로는 크게 보이지 않아도 정부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거나 업계에서 회자가 되고 있는 이슈라면 메시지의 복잡도가 올라간다. 이슈는 눈덩이 같은 속성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유사성이 있는 이슈를 만나면 같이 뭉쳐서 더 크게 키워지기 쉽기 때문이다. 더욱 세심하고 정교한 메시지 전략이 필요한 때이다.
대응 메시지의 큰 방향성이 정해졌다면, 이제 메시지 초안을 잡을 때.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대응 메시지는 '균형'이 있는 메시지다. 정무감각*이 좋은 홍보 리더들은 대부분 이 균형감각이 좋다. 기업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미디어(=여론)가 듣고 싶어 하는 공감 가능한 메시지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한달까. 기업이 하고 싶은 말 위주로 메시지가 잘못 나가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사태가 발생한다. 기업 입장에서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최대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정무감각은 본래 정치권에서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에 따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역량으로 알려져 있다. 홍보인의 정무감각은 여론의 방향을 감지하는 역량을 의미한다.
메시지 초안을 잡고 나서 혹시 해당 메시지가 나갔을 때 소외된 이해관계자는 없는지 한번 더 체크해 본다. 대부분의 이슈는 이해관계자가 고객에 한하지만, 어떤 이슈는 (얼핏보면 잘 안 보여도) 파트너사(협력사) 또는 정부까지 실타래가 옅게 연결돼 있는 경우들도 있다. 이해관계자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고객에게는 분명 좋은 메시지지만 정부의 특정 정책에 반하는 메시지로 보일 수도 있고, 혹은 파트너사에 책임을 떠넘기는 모양새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 돌다리를 두들기는 마음으로 모든 이해관계자가 고려됐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하자.
이렇게 메시지를 내부적으로 충분히 검토하고 수립할 여유가 주어지면 다행이지만, 사실 홍보실로 들어오는 문의는 분초를 다투며 빠르게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메시지가 늦어질 경우 우리의 입장이 하나도 담기지 않고 기사가 나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언론의 문의를 받은 홍보실 담당자는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그럼에도 메시지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아야 한다. 예전에 백악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던 참모들은, 준비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로프를 매지 않고 뛰는 번지 점프’에 비유하기도 했다 한다. 정비되지 않은 메시지를 내보내느니 차라리 "정확한 사안은 내부 확인 중으로 답변이 어렵다"라고 하는 게 훨씬 낫다. 나 또한 한번 뱉어 기사에 박제된 말은 절대 주워 담을 수 없음을 항상 명심하며 대응하고 있다.
PR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상무님은 홍보를 30년 가까이해도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수비 전 때문이다. 공격을 할 때는 내가 공을 어떻게 어디로 찰지 준비가 가능하지만, 수비할 때는 공이 언제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른다. 그래서 기업 커뮤니케이션실은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다 보니 PR업에 있는 동료들, 선배들께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어졌다. 모두 고생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