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교육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지난 추석 때 부모님이 걷기 여행을 떠나서 만나지 못했는데 얼마 전 연휴에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러 갔다. 늘 아이들과 함께하느라 정신이 없어 엄마 아빠의 여행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거제도 다녀온 이야기며 이런저런 여행기를 듣게 되었다. 69세의 엄마 아빠는 몇 년 전부터 해파랑길, 제주 올레길, 남파랑길, 갈매길 등 전국 곳곳 유명한 길을 도보 여행하고 계신다. 정년이 되어 퇴직한 아빠는 지금도 아파트 환경 미화 일을 하시는데 엄마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해 두 분 다 일을 놓지 않는 중이다. 앞으로 2, 3년 더 일하고 노후에는 시골에서 농막을 짓고 사는 꿈을 꾸신다.
일하는 중에도 주말이나 휴가 때 시간을 내서 걷기 여행을 하시는 두 분이 참 대단하다. 그냥 걷기 여행도 아니고 배낭에 텐트와 버너, 코펠 등을 챙겨 다니시는 것도 놀라운데 그냥 숙소에서 자면 되지 않느냐 해도 걷기 여행에서 숙소 찾고 식당 찾고 하다 보면 시간도 들고, 돈도 많이 드는 데다 이런 것도 재미라고 하시니 말릴 도리가 없다. 바다 근처에 텐트를 쳤다가 파도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결국 다시 철수하셨다는 이야기며, 밤에 너무 추워서 다시 배낭에 짐을 넣고 두 분이 밤새 걸으셨다는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들었다.
할머니는 살아 계실 때 아빠가 혼자 한글을 떼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뗐을 정도로 참 영특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하지만 아빠 어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6남매의 장남이셨기에 결국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찍부터 일을 하셔야 했다. 엄마는 가끔 아빠가 제대로 공부했으면 뭐라도 됐을 것이고 큰 일을 해도 했을 거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지금도 아빠의 정치, 경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끔은 강의를 듣는 기분일만큼 참 아시는 게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엄마는 사위 앉혀놓고 또 강의한다며 뭐라 하시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아빠가 이런저런 일을 하시느라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제대로 공부하실 수 있는 여건이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교를 나오고, 성공적인 직장을 얻어서 아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면. 부와 명예를 얻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마 지금의 부모님 세대는 훨씬 더 넉넉하지 못했기에 그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공부에 재능이 있었던 아빠는 본인이 살아온 삶에 대해 원망이나 아쉬움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빠를 뵈면서 아빠는 누구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하는 중에 생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완전히 일을 그만두시면 스타렉스를 사서 엄마랑 차 박하며 걷기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말씀하시는 아빠의 표정은 참 행복해 보였다. 아빠는 뭐든 뚝딱 잘하시니 농막도 멋지게 잘 관리하실 것 같았다.
아빠의 지난 세월에는 학벌, 대기업, 안정적인 직장 대신 이런저런 일을 하며 고생하고 아끼고 또 아끼는 시간들이 있었다.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더 열악했을 그때, 아빠가 겪었을 힘든 시간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만 아빠를 봐오면서 책으로 배우는 것 대신 몸으로 배우는 일이 더 많았을 아버지에게 그 경험들이 자산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가 4살 때 친정집 변기에 장난감을 넣어서 무슨 방법을 써도 계속 막혀 난감했던 적이 있는데 결국 아빠가 철물점에서 시멘트 가루와 석고를 사 오셔서 변기를 뜯고 장난감을 꺼내 다시 변기를 설치했던 모습은 잊히지가 않는다. 혼자서 방충망을 바꾸기도 하시고, 집에 가스렌인지 후드도 직접 교체하시고, 소소한 것은 직접 고치며 텃밭을 정말 잘 가꾸시는 아빠를 보며 배움은 공부로서만 얻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 여전히 학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이지만, "좋은 대학교 나오는 것보다 마음이 건강한 게 제일 중요하지"하는 말씀이 참 든든하다. 20년도 넘게 탄 오래된 아빠의 승용차가 고급 승용차 못지않게 멋져 보였다. 진심으로.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일반적으로 판단하는 성공의 틀에서 벗어난다면 얼마든지 '내가 주인으로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들이 가진 공부 재능을 키워줄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들이 공부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에 달려있으니 크게 실망할 것도 미안해할 일도 아니라고 위안한다. 그저 수많은 경험과 과정에서 남들이 아닌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먼저 생각할 수 있게 옆에서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들이 책상에서 앉아서만 하는 공부, 책을 통해 얻는 지식 말고도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응원할 것이다. 그게 더 고생스럽고 불안정할 때도 있겠지만 네가 지나온 시간 중에서 어느 하나 쓸모없는 시간은 없었다고 늘 격려해주는 부모이고 싶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육아를 하는 분들이라면 마음속에 늘 담고 있는, 때로는 심각하게 툭 터져 나오는 질문 같습니다. 8살, 6살 남매를 키우고 있는 저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어렵기만 합니다. 가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교육에 대한 제 소신을 조심스레 밝힐 때면 "아이들이 어릴 땐 나도 그랬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첫째가 학교에 입학하며 '진짜 교육 현장'에 한 발짝 발을 딛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지만, 아이들과 내 소신을 믿는 마음으로 걱정을 덜어 내어 봅니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할 교육에 '소소 교육'이라는 이름을 지어보았습니다.
'소소하다'는 작고 대수롭지 않다는 뜻도 있지만, 밝고 환하다는 뜻도 갖고 있어요.
그렇게 소신을 갖고, 작은 움직임으로, 아이와 밝고 환하게 교육 제도의 긴 터널을 지나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