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교육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길고 긴 겨울방학, 아이는 '제대로' 혼자만의 방학을 보내고 있다. 초등 입학한 뒤 여름 방학은 동생과 늘 함께했다. 그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어린이집이 긴급 보육만 하고 있었기에 둘째도 첫째 방학 기간에는 계속 가정 보육을 했었다. 주말의 연장처럼 아침에 일어나 둘이서 놀고, 둘이서 같이 밖에 놀러 가고 나도 둘을 데리고 박물관에도 가고, 집 근처 계곡에도 가고 그렇게 지냈는데. 40일이 넘는 겨울 방학, 집에서 첫째와 뭘 하며 보내야 하나 종업식 다음날부터 참 막막했다. 그래! 계획을 세워보자. 아니 세워보라고 하자!
"방학 계획표 만들어볼까?" 제안하고 나서 둘째를 등원시키고 집에 오니 접시로 동그라미도 그리고 계획표의 절반을 거의 채웠다. 오전에는 아침 먹고 엄마 스마트폰 10분, 자유시간, 과제하기. 오후에는 점심 먹고 밖에 나가서 놀고 갔다 와서 저녁 먹고 자유시간 그리고 취침. 이렇게 심플할 수가!
"그래, 앞으로 이렇게 계획표대로 하면 되겠다!"
계획표 중에서 제일 착실하게 지키는 것은 엄마 스마트폰 10분 사용. ㅎㅎ 스마트폰은 화면이 작아 대신 아빠 태블릿을 사용하도록 했는데 스스로 알람을 맞추고 보고 싶은 영상 찾는 걸 도와주면 한 편씩 시청한다. 보통 15분에서 18분 정도 되길래 "20분 사용하기로 수정해야겠다" 말해줬다. 그리고 오전에 과제하기는 점점 늦어지더니 점심 먹고 밖에 놀러 가기 전에 하는 것으로 실천 중이다. 수학 문제집 2장 풀기, 짧은 영어책 한 권 듣고 읽기, 파닉스 2장 이렇게 매일 하고 있는데 한꺼번에 다 할 때도 있고 절반만 하고 절반은 저녁 먹고 할 때도 있고. 춥거나 나가기 싫은 날에도 한, 두 시간은 꼭 밖에서 뛰어놀기는 지키도록 하고 있고 나머지 시간은 무엇을 하든 본인의 자유. 단, 저녁 8시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다 같이 정리하기, 9시에서 9시 반에는 취침, 이것만 규칙으로 정했다.
학기 중에 숙제로 꾸준히 하던 '일기 쓰기'는 계획표에 넣더니 한 번도 쓰는 걸 본 적은 없다. 억지로라도 쓰게 할까 하다가 관뒀다. 언젠가 쓰고 싶을 때 쓰겠지.(방학이 되니 나도 시키기 귀찮아지는 것도 사실) 방학 초기에는 색종이 접기에 푹 빠져 이것저것 접더니 언젠가는 레고 블록을 종일 하는 날도 있고, 요즘은 그림 그리고 뭔가를 만드는데 하루를 보낸다.
아이 방학 기간이라 내 시간이 많이 없어 틈나는 대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운동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아이 학습을 잘 챙겨주지 못한다. 했구나 안 했구나 확인하는 정도만. 사실 방학 전에 아이 수학 문제 틀린 걸 가르쳐주다가 두 번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옆에 앉아 아이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서, 내 말을 제대로 안 듣는 것 같아서 목소리가 커지고 아이는 주눅 들고. 결국 "이해했으면서 왜 안 써! 옆에다 쓰라고!" 나는 폭발하고, 아이는 끝나고 울음을 터뜨리고. 나중에 아이에게 사과했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 들면서, "그럴 거면 학원을 보내"라는 남편의 말에 생각이 많아지는 때가 있었다. 가정학습에서 대부분의 갈등은 공부를 가르치면서 생긴다는 이야기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공감하게 되다니. 그 뒤부터 가르치는 일이 조심스러워 아이가 계획한 걸 잘하고 있는지만 지도해주는 편이고 겨울방학 때는 더 멀리서 지켜보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도 많은데 이것저것 집에서라도 좀 시켜볼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방학 때라도 책을 좀 많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영어 공부를 좀 열심히 했으면 좋겠는데, 다음 학기 공부도 좀 미리 해두어야 할 텐데 걱정하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듣곤 한다. 그런데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다가 이 부분에서 멈췄다.
좋아하게 만들려 하지 말고
'싫어하지 않게' 만드는게 실은 더 고단수예요.
싫어하지 않으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어요.
그 다음 지속하거나 파고드는 건 아이의 선택이지요..
싫어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가능성은 열려 있어요.
좋아하게 만들려다 싫어하게 만드는 것이 실패입니다'
<엄마의 소신, p124>
싫어하지 않게 만드는 게 더 고단수라니. 하긴 억지로 시키거나 너무 많이 시키려다 싫어하게 되면 그걸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꾸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니까. 아직은 좋아하지 않고, 잘하지는 않더라도 '싫어하는 마음이 없다면' 시도해 볼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좋아하거나 잘하게 만들지 않더라도 '싫어하지 않도록' 하기. 왠지 부담감은 줄어들고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방학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