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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타 Sep 24. 2024

텍사스 일기

240923

텍사스 일기 240923


오늘은 조깅을 할 수 있었다. 어제는 전혀 조깅을 할 수 있는 기력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괜찮았던 것 같다. 새로운 노래를 들으면서 열심히 4마일을 뛰었다. 땀에 푹 젖은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다시 술을 마신다. 맥주 2잔을 마시고 있다.


<피아노 치는 여자>라는 책을 읽었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인데, 영화를 먼저 본 입장으로서, 친척 집에서 이 책을 보니 반가웠다. <피아노 치는 여자>를 완독하고 <피아니스트>를 다시 한번 시청했다. 영화와 소설 모두 수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에리카는 가족,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억압당하고 정서적으로 감금당해 성적으로 불구가 된 삶을 산다. 그 와중에 그녀의 안에서 조립된 사도마도히즘. 에리카는 자신의 학생인 클레머에게 이런 사도마조히즘을 고백하게 된다. 아마 이러한 고백은 어머니 아래에서 성적으로 억압당한 에리카가 다시금 능동성을 되찾는 실행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너에게 이런 방식으로 종속당하고 싶어.” 그 모습이 마조히스트로서, 수동적인 모습으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에리카의 마조히스트 고백은 소설 내에서 능동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클레머는 이러한 에리카의 고백의 능동성을 간파하기보다는, 그저 에리카를 자신의 방식대로 굴복시키고 억압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에리카, 네가 때려달라고 했잖아? 너도 이걸 원했잖아?"


에리카의 고백은 분명 겉으로는 수동성을 띄고 있지만, 클레머에게 능동성이라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여한다는 점에서, 에리카의 고백은 능동적이다. 에리카의 성적 각본 안에서 수동적인 클레머는 능동성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레머는 여기에 따르지 않는다. 에리카를 굴복시키고, 에리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결국 어머니에 이어 클레머에게도 자신의 능동성이 다시 한번 억압된 에리카는 칼을 들고 클레머를 찾아간다. 그러나 클레머의 모습을 보고, 결국 그 칼을 클레머에게 향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향한다. 소설과 영화는 자기 자신에게 칼을 꽂고 다시금 어머니의 집으로, 억압으로, 감금으로 향하는 에리카의 모습을 비추며 끝이 난다.


비극적인 영화였고, 클레머의 모습과 에리카의 모습 둘 다에서 나를 찾을 수 있었으므로, 매우 귀중한 영화였다.


오늘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조깅을 하고 나서 다짐한 것이 있다. 다음에 전 애인을 본다면, 첫 마주침에서, 첫눈길에서, 첫 모습에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활짝 웃어 보이며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걸로 나는 한 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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