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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리얼중독자 Feb 04. 2024

미제

상실

할머니가 죽었다. 나는 아직 무덤에 가지 않았다.


그녀와 기억나는 일 중 시기상 앞선 것은 그녀의 손을 잡고 성당에 갔던 날이다. 나는 누군가가 주었던 초콜릿맛 츄파춥스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다. 높다란 천장과 주말의 햇빛 속에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나는 주변을 서성이다 사탕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내던져진 사탕이 산산이 부수어졌다.


그녀는 나에게 곧잘 2천 원을 주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빚처럼 받아내는 용돈 중 일부를 꼬깃꼬깃 접어 매일 자신의 방 안락의자의 방석 밑에 넣어두었다. 나는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의 방에 찾아가 방석 밑에 손을 넣었다. 그녀는 손녀인 내 쌍둥이에게는 2천 원을 챙겨주지 않았다. 나는 외출할 때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거나 문방구에서 유희왕 카드를 샀다.


그녀가 변신 로봇을 사준다고 하던 날, 계산을 하던 마트 캐셔가 100원이 부족하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몰라보게 붉어졌다. 그녀는 100원도 못 깎아주냐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마트 캐셔의 당황스러운 눈빛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빼앗기지 않을 것처럼 로봇을 가슴에 꼭 안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그녀와 헤어진 것은 아버지가 그녀를 더 이상 맡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떠맡기듯 그녀는 고모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방은 텅 비어서 창고가 되었다. 나는 몇 년간 그녀를 잊고 지내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그녀를 다시 보았다. 어느 저녁에 그녀가 집에 찾아왔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는 외출복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는 이전보다 몰라보게 굽어 있었고, 손가죽은 쪼그라들어 말라있었다. 그는 거실로 들어서며 힘없는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고모가 계속 나를 때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했다. “고모가 할머니를 때린대요.” “금방 가마.”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빨리 나가세요.”하고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오신 거예요.” 아버지는 택시를 태워 그녀를 고모에게 돌려보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가 죽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수업을 가려는데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의 전화를 무시하고 집을 나섰다. 오후 늦게 집에 돌아가니 할머니가 집에 와계셨다. 아버지는 고모가 죽었다고, 아침에 할머니가 거실로 나왔을 때 고모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얼핏, 자살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고모의 장례식은 치르지 않았다. 고모의 화장이 끝난 후 아버지는 할머니를 집에 들였다.


그녀의 방은 내 방의 맞은편이었다. 나는 그녀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그녀가 항상 갈색콩조림에 설탕을 비벼먹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만든 음식은 쉽게 쉬어버렸다. 아버지는 굳이 할머니 용으로 작은 밥솥을 따로 샀다. 그 밥솥의 밥은 쉽게 쉬었다. 나는 곧 그 쉰내를 참을 수 없어졌고, 그만큼 그녀도 참을 수 없어졌다.


내 방에 있으면, 그녀의 방에서는 곧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은 때로 일본어였고 때로 한국어였다. 슬그머니 풍겨오는 쉰내처럼 그녀의 말이 내 방을 파고들곤 했다.


그녀를 돌보던 어느 날,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자신이 쓴 시가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고, 그래서 1억 원을 받아야 하는데, 중간에서 누군가 그 돈을 가로채서 아직 그 돈을 받지 못했다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아쿠타가와 상을 검색해 보았다. 아쿠타가와 상은 소설에만 주어지는 상이었다.


“또 그 거짓말.” 내가 아버지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질린다는 듯 혀를 찼다. 내 방에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나는 그녀의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내 방과 아버지의 집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나는 그녀의 병실을 찾아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 그녀는 화장되어 고모와 같은 곳에 묻혔다. 나는 그녀의 무덤에 가지 않았다. 그녀의 거짓말만 이따금 혼잣말처럼 내 기억 속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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