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산문가 프랜 리보위츠는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하는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에서 “어떤 것을 내보일 때에는 그만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 요즘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라고 꼬집은 적 있다. 이 글은 그런 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이 없는 글, 남을 위할 수 없는 글, 그걸 각오하고서라도 적게 된다.
안녕, 오늘은 내 이야기를 해볼게. 오늘도 샤워를 하면서 울었어.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가슴에 응어리가 있었는데, 그게 마침내 아침 샤워를 하면서 터져 나왔나 봐. 시리얼을 먹다가도 울고, 샤워를 하다가도 울고, 샤워를 끝내고 머리카락을 빗자루질하면서도 울었어.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내 안경 위에 방울방울 맺혔어. 그때까지도 울음이 참아지질 않더라고.
약을 먹고 있는 건 알지. 쿠엔타핀, 아빌리파이, 그리고 다른 것들. 최근 약을 증량했고, 의욕이 나도록 조절했어. 그래도 어떤 마음의 상처나 흔적은 전혀 없어지지 않나 봐. 나도 어디서 얻은 건지 모르는 이 상처와 흠집에 약은 전혀 도움이 안돼. “약이 의욕을 나게 만들 수는 있죠. 근데, 마음의 문제는 또 다른 거니까요.”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어.
외롭고 쓸쓸해. 외롭고 쓸쓸하다는 느낌이 나를 울게 만들어. 혼자됨은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이라지. 그것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느낌 때문에 울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나는 말이야, 내가 무언가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많이 좋아해 주고, 그러면 덜 외롭고 덜 쓸쓸해질 줄 알았어. 살을 빼고, 성형을 하고, 욕을 하지 않고, 예쁜 말을 하고, 공부를 아주 많이 하고, 상대를 돌봐주고, 항상 밝은 모습만 보이면 그렇게 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아주 가끔씩 혼자되는 기분이 들 때, 내가 가장 덜 외롭고 싶을 때 내가 혼자가 되면, 눈물이 펑펑 나와.
외롭고 쓸쓸해. 다만 그 감정만 너무 강렬하게 남았어. 나는 항상 누군가를 먼저 안아주는 편이었어. 내가 안기고 싶다는 걸 느끼면서도, 항상 누군가를 먼저 안아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나를 안아주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나 같은 사람을 보면 먼저 안아줬어. 나도 그냥 그러고 싶은 건데.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건데.
너가 그랬잖아. “항상 멋진 모습으로만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 너는 고민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내가 그런 척을 너무 잘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그런 척을 무척이나 잘하게 될 거야. 아, 그래서 그런가 보다. 내가 가끔 연락이 없는 시기는 그런 척을 하기 위해서 힘을 비축해 두는 시기라는 걸. 그래서 의욕이 안나는 거고, 그래서 연락을 안 하는 거라는 걸 알겠네.
나는 항상 무언가를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어. 일상에서 얻은 단편적인 깨달음들을 항상 어딘가에 저장하고 기록하고 묶어둬. 그게 언젠가 나를 살리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이 글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펑펑 울면서도 생각했거든. ‘이 깨달음을 꼭 잊지 않아야 해. 그래야 다음에 더 잘할 수 있어.’
너가 그랬잖아. “너는 너 고민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적어봤어. 이게 내 이야기의 단편이야. 나는 내 이야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터져 나올 때 왕창 적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 내 이야기를 해봤어. 들어줘서 고마워.
이 글은 어떤 재능도, 어떤 독자도 상정하지 않고 쓰였다. 다만 이 글 자체가 나를 위한 좋은 기록이 되길 바란다. 아직 글쓰기도, 말하기도, 나는 너무 무서운 사람이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