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에겐 빌런이었겠지.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밥 벌이는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MD 일을 하다 보면 정말 이 세상엔 별에 별 사람 다 있구나 싶다. (누군지 드러날까 싶어 약간의 각색을 첨가했지만 과장은 없습니다)
우리 회사 제품이 무조건 최고라는 대표님
이런 케이스는 그래도 귀여운 악당 수준이다. 그 가격으로 파실 거면 아무도 안 살 것 같다고 이 구성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씀드려도 자부심인지 아집인지 담당 카테고리 MD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막상 매출 안 나오면 전화로 메신저로 들들들 볶는 파트너사 대표님은 정말 동생이었으면 꿀밤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또 나만 진심이었지. 두 얼굴의 철면피 담당자
우리 채널 단독 가격으로 좋은 구성으로 주신다고 해서 힘겹게 노출 좋은 구좌 잡아줬는데 같은 날 다른 채널에서 조금 더 싸게 행사해버리며 뒤통수 때리는 파트너사 담당자. 그래 놓고 다음번 행사 때 MD님 밖에 없다며 좋은 구좌 노출해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사람의 얼굴 피부는 아이언맨 마스크를 용접했나 싶다.
신데렐라네 이복언니 같은 담당자
내일이 행사 날인데, 재고며 상세 페이지며 제대로 세팅도 안 해놓고 반차 써버리는 브랜드 담당자. 이렇게 얼렁뚱땅 할 일을 채널 MD에게 다 넘기고 가면, 신데렐라 언니들이 집안일 다 넘기고 무도회장 간다고 룰루랄라 했을 때 신데렐라의 심정이 십분 이해 간다. 물론 고객사 매출이 내 매출이고 중요한 행사를 펑크 나게 할 수 없다. 요정 할머니도 없이 야근해가며 꾸역꾸역 MD가 세팅을 해주지만 계속 이러면 내가 월급을 양쪽에서 받아야 하는 건 아닌가 회의감이 들게 한다.
업무 미팅을 소개팅이랑 착각하는 담당자
말 그대로다. 담당 MD가 여자인걸 알게 되고 꼭 미팅을 퇴근 후에 혹은 주말에 잡으려고 하는 속 보이는 놈팡이가 존재한다. 자꾸 사적인 이야기 물어보는 담당자 때문에 유부녀 인척 조카 사진을 프로필에 걸어 놓은 동기의 이야기는 웃기지만 눈물겹다.
물론 외부에만 빌런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부의 적은 외부의 적보다 더 짜증 난다. 얼굴을 대면하고 같이 일해야 한다는 거다. 내부의 빌런들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몇 마디 해본다.
“온라인 채널은 역시나 노출이 중요하다고 누누이 이야기해주셨던 과장님, 내 뒤에서 기획팀과 담당에게 몰래 영업해서 내 계좌 뺏어버리셨죠? 둘이 사내 연애 중이신 거 복사기 빼고 다 알아요.”
“매출 떨어지는 거 메이크업 방안 보고하라는, 보고랑 회의 좋아하시는 실장님, 사실 실장님한테 보고할 보고서 만드는 시간에 가격이라도 구성이라도 좀 더 협의하면 실질적으로 매출 상승에 기여가 된답니다.”
행사 일정에 맞춰 고객사랑 가격 구성 다 픽스해 뒀더니 갑자기 판촉률 변경해버리는 판촉팀과 행사 운영팀에게는 더 이상 할많하않.
플러스로 지인들의 어이없는 쇼핑 부탁이다. 부모님이 생활정보 프로그램 보고 너네 회사에서는 이런 영양제 안 파냐며 영양제 좀 사달라고 말씀하시는 건 효도할 기회를 주시는 귀여운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패션 카테고리 담당인 내게 이 전자제품 왜 싸게 안 파냐며, 싸게 행사 좀 해줄 수 없냐며 물어보는 지인은 무슨 생각인가 싶다.
인간에게 일정량의 스트레스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했던가. 항상 나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든든한 빌런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전한다. 참치 삼각김밥 샀는데, 참치는 없고 김이랑 밥만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