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연말 민이는 연주와 수업들로 인한 많은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빴고, 나도 많은 회사 고민과 이것저것 머리가 아팠다. 둘 다 시간과 마음속에 쉴 틈이 생기질 않았다. 25일 성탄절에도 마음껏 쉬지 못했고, 31일에도 민이가 늦은 시간에 귀가해야 했어서 휴식 속 차분한 연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고생 끝에 복(?)이 온다고 1월 1일에 쉬고, 2일에서 4일까지도 조정할 수 있는 일정들로만 채워져 있어 그 기간에 재충전하기로 했다.
일정은 정했고 바람 쐐러 갈 목적지를 정해야 했는데 결국 전날 되어서야 정하고 숙소 예약을 했다.
무한도전 재방송 보며 가보고 싶던 경주, 민이가 좋아하는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수, 이유 없는 강원도 고성 등등 찾아본 건 많은데 아니나 다를까 결정을 계속 미뤘다.
30일 날 같이 퇴근하며 '서울에서 가기 좋은 고성이 좋겠다, 안 가봤다. 이젠 정하고 예약하자. 우리 갈 수 있는 거 맞아?'라는 민이의 말에 결국 고성행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 1박만 예약했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캐리어 하나에 짐을 싸고 10시가 넘어서 출발했다. '가서 늦은 점심 먹지 뭐~'라는 생각이었다. 첫 운전수는 민이었고 나는 옆에서 열심히 지도를 봤다. 고성 가는 길에 속초를 들러 점심 먹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맛있어 보이는 식당 몇 개 찾아 점찍어 놨다. 커피와 빵 수혈을 위해 우리에겐 익숙한 내린천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고 신나는 마음으로 다시 속초로 향했다.
속초에 가까워가는 이정표가 보일 때쯤부터 건너편 도로에 차가 엄청 많아졌다. 동해에서 새해 첫 해돋이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 같았다.
우린 역시 운이 좋아, 우리 가는 길은 막히지 않는다며 나쁜 하하 호호하며 속초 시내로 들어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못된 마음은 벌을 받는다. 속초 시내엔 아직 인파가 엄청 많았다. 중앙시장에 들어서는 길이 꽉 막혀있고 주차장에도 사람들과 차가 엄청 많았다. 한시가 넘어 배고프고 지쳐 다른 데로 차 돌리고 싶어 하는 나를 데리고 강행돌파한 민이가 결국 운 좋게 시장 주차장에 주차를 성공해 냈다.
시장에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 밥부터 먹고 구경해야겠다 싶어서 아까 찍어둔 해물라면 식당으로 갔으나 외관을 보고 돌아섰다. 당황하지 않고 차에서 미리 준비해 둔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생선구이집인데 갯배선착장 근처에 있었다. 걸어갈 수 있을까 망설였지만 시장에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었다. 도착하니 오후 두 시가 넘었는데 다행히도 식사할 수 있었다.(브레이크 타임엔 손님들을 받지 않으셨다.) 두시 반에 점심 먹으려니 웨이팅도 없어 좋았다.
배가 고파 그런 건지 너무 맛있었다. 수산물을 잘 몰라 무슨 생선인지, 좋은 생선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생선도 반찬도 깔끔하니 괜찮았다. 서빙해주시는 모든 직원분들이 외국분들이셨는데 이 때는 아무 생각도 없고 몰랐다. 젊은 한국 사람들이 강원도에도 부족하다는 걸.
만족스러운 첫 끼니를 먹고 갯배선착장을 구경만 하다가 시장으로 다시 향했다. 사람이 무척 많긴 했지만 이것저것 구경할 게 많았다. 민이가 길쭉이호떡을 보고 발걸음을 떼지 못해 기대 없이 사 먹었는데 평가가 갈렸다. 나는 적당히 달콤한 조청의 맛이 너무 좋았는데, 민이는 맛있긴 하지만 덜 달다며 아쉬운 평가를 내렸다.
속초를 좀 더 둘러보면 좋았을걸, 바로 고성으로 향했다. 봉포항 해변 근처 숙소를 잡아두어 차 타고 북쪽으로 20여분 시원하게 쭉 달리면 됐다.
고성을 다시 올 줄이야. 2011년 겨울, 춘천의 102 보충대로 입대해서 고성 22사단 신교대로 배치받았었다.
입대하고 고성이라는 곳을 처음 알았다. 지도를 봤는데 한숨만 나왔었다.
지나간 일이니 추억이지만 너무 춥고 배고팠던 기억밖에 없다. 무슨 훈련인지 기어야 했는데 땅이 얼어 팔꿈치가 너무 아팠고, 동기와 배고파서 면 장갑에 고이 싸서 관물대 위에 숨겨둔 초코파이를 쥐가 파먹었다.
장갑과 초코파이 동시에 잃고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너무 슬펐던 기억뿐이다.
숙소도 기대 이상이었다. 깔끔한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바다가 아무런 가림 없이 다 보였다. 창문 여니 파도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겨울 파도답게 고요함 속에서 더 울려 퍼졌다. 그냥 앉아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은 겨울 해가 지기 전에 나가서 겨울 바다 산책을 했다. 차가운 소리를 내며 파도치는 고운 모래 해변에 새들 따라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바람은 잠시 무뎌졌는지 춥긴 했지만 날카롭진 않았다.
카페에서 난로 냄새 맡으며 잠시 앉아 사진 구경도 하고 기억 안나는 내용의 수다를 떨다가 민이가 노래를 부르던 횟집을 가기 위해 일어났다.
1km 정도를 걸어갔다. 해는 이미 져서 깜깜했지만 걸을만했다. 여름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다른 음식점과 숙소들 구경도 하며 걸어가니 금방이었다.
걸어가는 길에 여기도 외국인들이 많아 낯설었다. 관광객이 아니라 근처에서 숙식하시며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 같았다. 목적지인 횟집에 들어서니 점심의 생선구이집과 똑같이 외국분들이 가게일을 하셨다. 청년들이 많이 부족한 게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횟집에서 이번 여행의 작은 실수를 하게 된다. 우리 위의 크기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당당히 모둠회를 시켰는데 양이 너무 많았다. 회도 많이 먹으면 질릴 수 있구나 싶었다.
모둠회 종류라도 다양했음 나았으려나, 제주도에서 갔던 횟집의 밑반찬들과 다양한 회가 비교되며 떠올랐었다. 물회정도로 간단하게 먹을걸 과욕이 부른 살짝 아쉬운 저녁이었다.
그래도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나와, 늦은 밤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고 숙소로 다시 걸어가는데 하늘에 별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집 뒤에 산이 많아 그런지 서울에서도 별이 잘 보일 때가 있는데 차원이 달랐다.
카메라에 차마 담기지 않아 나는 포기하고 눈으로 담고, 민이는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다해 카메라에 담았다.
깜깜해져 보이진 않지만 보이더라도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바다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나는 차마 이해할 수 없는 자연과 그 크기가 느껴지며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삶이 힘들 때 압도적인 풍경이나 자연을 보면 오히려 내가 가진 문제들은 조그맣게 보인다. 세상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내가 매몰되어 있는 건 하찮은 게 아닐까,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겠는가.
조용하면서 어두운 파란색의 겨울 고성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