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겨울,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하루 늦은 새해 일출을 봤다. 크게 의미 두지 않지만 그래도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니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느긋하게 체크아웃하고 1층 카페에 앉아 커피와 빵을 먹었는데 전 날 먹은 회가 소화되지 않았는지 민이와 나 둘 다 속이 메슥거렸다.
캐리어를 차에 싣고 '어디를 구경 갈까~' 지도를 보니 역시 통일전망대가 눈에 띄어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중간에 민이가 좋아하는 물고기 구경을 할 수 있을까 해서 화진포 해양박물관을 네비에 목적지로 찍었다. 올라가는 길엔 내가 운전했다. 아야진, 교암리, 삼포 등등 해변과 해수욕장이 계속 이어지는데 도로 옆 종종 보이는 바다들은 조용하면서도 정말 파랬다.
30분 정도 올라갔을까 김일성, 이승만 별장이 근처에 있다는 이정표가 보였고 해양박물관에 도착해 주차했다. 멀미하는 민이와 바람 쐐러 함께 주변을 걸었다.
전혀 몰랐는데 신기하게도 화진포는 호수였다. 다리를 하나 두고 우측에는 호수, 좌측에는 바다다.
우측의 호수에는 얼음이 껴있고 좌측의 바다에서는 파도가 쳤다. 생소하면서도 멋진 광경이었다.
호수 뒤에는 산이 펼쳐져 있어 권력자들이 왜 여기에 별장을 많이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인터넷 찾아보니 예전에 동해 바다였던 곳이 시간이 흐르며 바다와 격리되면서 형성되었으며, 담수와 해수가 섞인 석호(사주나 사취의 발달로 바다와 격리된 호수)라고 한다.
호수를 따라 화진포 해수욕장으로 가서 해변을 잠시 걸었다. 어제 걸었던 모래사장과 다르게 여긴 굉장히 고운 가루의 모래들로 덮여 있었다.
바다의 색도 북쪽으로 올라올수록 점점 진해졌다. 바다는 파랗지 않고 바다는 퍼랬다.
파도와 의미 없는 장난을 치다 보니 멀미가 가라앉았는지 슬슬 추워져 바로 앞에 있는 해양박물관에 들어갔다. 입장료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비싸지는 않았다.
입구로 들어서면 1층엔 연체동물에 대해 쭉 전시되어 있다.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 같았지만 자연 지식과 거리가 먼 나에겐 생전 처음 들어본 내용들도 많아서 재밌었다. 2층에도 전부 기억나진 않지만 조개 같은 해양동물들에 대한 전시였다. 나름 기술을 사용해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어린이 전용 부스들도 종종 있었다.
관람객이 거의 없어 민이와 나도 해봤다.
3층은 옥상과 화장실, 카페와 소소한 기념품 가게고 3층을 통해 넘어가면 거기서부턴 작은 수족관이다. 나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물고기와 해양 동물들도 있다.
애초에 수족관이 아닌 박물관이니 아쿠아리움이나 해유관 같은 기대보단 잠시 몸 좀 녹이며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괜찮은 것 같다.
한 시간 정도 구경하고 다시 또 통일전망대를 향해 올라갔다. 전 날 과식의 여파로 점심은 근처 해수욕장 편의점에서 간단히 때웠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에 거의 다와갈무렵 출입 신고 해야 한다는 경고 표지판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출입 신청 사무소에 주차장이 있고 잠시 차를 세운 후 건물로 들어가 차량 등록과 서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누락이나 잘못 적으면 다시 작성해서 다시 줄 서야 하니 제대로 확인하는 게 좋다. (세 번 줄 선 바보들은 우리다.) 무료는 아니고 입장료 등을 내야 한다. 역시 비싸지는 않다.
등록을 마친 후 잠시 기다리면 시간에 맞춰 안보 교육관 건물에서 교육 진행한다고 알려준다.
관광객 준수사항 교육을 시청각 자료로 진행한다. 구경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주의해야 할게 뭔지 등등 짧은 영상으로 다 알려줘서 걱정 없이 들으면 된다.
길지 않은 교육을 듣고 다시 차로 들어가 등록증을 운전석 앞에 놓고 다시 통일전망대를 향해 운전해서 올라갔다. 민통선 검문 후 들어서면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정해진 길로만 가야 한다. 안내 따라가면 통일전망대가 나오고 주차장이 있다.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언덕을 걸어올라 가면 드디어 통일전망대를 맞이할 수 있다. 올라오는 언덕에서 바라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서 전망대에서도 빨리 봐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탁 트인 하늘 아래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다만 휴전국이니 복잡 미묘한 생각도 함께 들면서 군인일 때 기억도 자꾸 났다.
대부분의 시절을 보낸 양구 가칠봉에는 여기와 비슷하게 자연 밖에 없었다. 내륙이라 바다는 없고 어마어마한 산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혼나거나 맞고 나서(다림질을 못해서 한 번 맞았었다..) 서러웠을 때나 헌병 조사받으러 가야 해서 걱정에 잔뜩 휘감겨있었을 때, 소초 밖에 잠깐 나가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와 산을 바라보며 달랬던 게 생각났다.
날씨가 너무 맑아 아무 방해 없이 모든 게 다 보였다. 정해진 시간마다 직원분께서 어디가 어디인지 설명을 해주시는데 듣는 걸 추천한다. 그리고 망원경은 출입 신청 사무소에서부터 계속 파는데 은근히 비싸다. 망원경 못 샀다고 민이가 계속 무척 아쉬워하는걸 전망대에 망원경 있을 거라고 계속 달랬는데 막상 도착하니 동전이 필요한 걸 보고 분노했다. 동전 몇 개 꼭 바꿔오는 걸 추천한다.
실컷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전쟁 박물관이 있다. 전쟁 영상(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 모형, 유해발굴 등이 전시되어 있고 생활관이 재현되어 있어 재밌어서 가볍게 구경할만하다.
차를 타고 다시 검문소 쪽으로 나가다 보면 DMZ박물관이라고 새 건물이 있다.
새로 만들어진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대 이상의 박물관이었다. 들어서면 역시 625 개전 시 남침에 대한 여러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DMZ의 철책을 재현해놓기도 했는데 구경할만하고 미디어 자료, 편지 등도 전시되어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또 DMZ 내 동물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박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통일에 대한 내용들로 꾸려져 있다. 마지막으론 남북의 찌라가 연도 별로 정말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구경할 게 많다.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맞춰서 나왔다. DMZ 박물관까지 보고 나왔는데 네시쯤이었던 거 같다. 기대보다 구경할 게 많고 알차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정말 한번쯤 꼭 가볼 만한 것 같다.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놀러 온다면 꼭 소개해주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슬슬 배가 고파져 민이 아는 사람에게 추천받은 아야진항에 있는 냉면집으로 향했다. 오미 냉면이라는 곳인데, 가게도 깔끔하고 너무 맛있었다. 냉면을 자주 먹진 않지만 먹은 냉면 중 최고다.
해가 슬슬 수평선 너머로 들어가려는 무렵 우리도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바쁜 연말로 많이 지쳐있기도 했고 둘 다 집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아야진 방파제와 빨간 등대에서 퍼런 바다를 마지막으로 머릿속에 실컷 담고 나서 속초를 통해 서울로 나갔다.
잔잔함 속에서 지도와 사진 말고는 핸드폰도 여행 내내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대화와 생각들도 많이 할 수 있었다.
하루정도 늦은 해돋이 여행이었지만 부족하지 않게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살짝 늦은 내 인생,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단지 늦은 것일 뿐인 사람들 그리고 민이와 나 모두 다 새해도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