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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가세요

by 완소준

2009년, 나는 들고양이 같은 모습으로 처음 뵈었다. 방황이란 들불에 휩싸인 나의 손을 두 손으로 차분히 잡아줬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챙겨 먹지 않을 나이었다.
연습이 끝날 때까지 나를 남겨두어 매주 한 번은 밥을 같이 먹었다. 그래서 20대 중반은 돈이 많은 줄 알았다.
내게 이것저것 묻지도 않았다. 이젠 기억이 나진 않지만 항상 비슷했다.
'그러면 안돼, 대학은 가야지, 2호선 다니는 데로 대학 가~'

근처에 연주가 있으면 나를 불러주셨다. 귀찮았다.
고기라도 먹으러 오라고 했다. 연주 뒤풀이 회식이다. 제자라고 소개하고 내게 고기를 먹였다.
그렇게 몇 번 간 기억이 있지만 동료 형님의 눈초리를 느끼고 그다음부터 잘 가진 않았다.

입대 전에도 밥을 먹었다. 한 시간 반이나 늦어서 호되게 혼났다. 차보단 사람이 기다려야 한다는 걸 평생 기억 하게 됐다. 그래도 기다려 주긴 했다.
그리고 카페에서 기도문을 적어서 내게 줬다. 당시엔 이게 뭐람 싶었지만 군생활을 하다 보니 읊게 됐다. 하지만 이젠 기억 나지 않는다.

전역 후엔 방황과 바닥의 끝이었다. 버릇없이 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똑같으셨다. 요동 치던 나는 앞에서 수저를 들고 있을 때마다 얌전해졌다.
다만, 쓴소리의 강도가 세어지긴 했다. 차갑고 쓴소리를 듣는 시간이 너무 싫었지만 받아 들어야 했다. 나도 당신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어찌어찌 복학하고는 정신 차리고 나름 열심히 살았다. 예전보단 비교적 가끔 '야~잘 지내?' 라며 전화가 왔고, 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문자 드렸다.
그리고 똑같이 여전히 내게 맛있는 걸 사줬다. 여전히 가끔 공연도 보여주고, 여전히 공연이 끝난 식사 자리도 데려갔다.
더 이상 쓴소리는 없었지만 잔소리는 여전했다. 이젠 맥주 딱 한잔과 함께 내가 몰랐던 많은 세상 이야기도, 어른들의 고민도 들을 수 있었다.

주변 분들 덕분에 운 좋게 감사하게도 취업하고 내 앞가림도 하게 되었을 무렵 염원하시던 결혼을 하셨다.
남자 사촌이 없다고 내가 축의금도 받았다.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솔직히 슬프기도 했다.
더 이상 의지하면 민폐구나, 이젠 스스로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

직장 생활도 열심히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보금자리도 가꾸며 열심히 잘 살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내 결혼식 이후로 뵙질 못했다. 1년에 한 번 기프티콘과 안부 연락을 하면 '야~ 뭘 챙겨~각자 잘 사는 게 그것만으로 감사지~'라고 했고,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냥 나의 삶만 챙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25년 3월, 이젠 시간을 내더라도 밥 먹을 수 없고, 전화도 닿지 않고, 기프티콘도 닿지 않는 곳으로 젊은 나이에 갑자기 떠나셨다.

진작 찾아 갈 걸. 전화라도 할 걸. 왜 미뤘을까. 후회, 반성을 바닥에 둔 채 생각과 마음이 천 갈래로 갈라져 나의 속을 쥐어짠다. 남겨진 가족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지없이 슬프다.

2호선은 아니지만 지하철이 다니는 대학에 갔을 때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회사 빌딩 손으로 점찍으라 해서 찍은 회사에 정말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드디어 짝 찾았냐며 이쁘게 연애하라며 응원해 줄 때도,
거금의 축의금을 툭 하고 주고 잘 살아~~라고 쿨하게 혼자 결혼식에 왔다 갔을 때도,
언제나 도움과 응원만 받았지 갚지 못했다.

나의 최저의 못난 모습을 지켜봐 줬는데 최고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게 됐다.

나중에 갚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보여주려 했는데, 그 나중이 더 이상 뒤가 없는 나중이 되어 버렸다.

말에는 항상 앞뒤를 붙여서 이야기해야 한다.

날티나면 안돼~ 깔끔히 입어야해.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기도하면서 존버해라.
속도 강해져야 하지만 겉도 강해져야 한다. 그러니 헬스 해라.
인간에게 가장 필요 없는 건 감성이다.
항상 정신 똑바로 차려라.

깊이 슬퍼도 후회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 가르침 준 대로 살아야 할 수밖에 없다. 기둥이 사라졌다고 무너지면 안 되고 배운 대로 내가 나와 내 사람들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담담하게 묻어두고 그 흙 위에서 잘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억하고 다짐하고, 그리고 세상에 이렇게 멋졌던 사람이 있었다 라고자 마음 잡고 글을 남긴다.

그만큼 멋진 사람, 포르투가 처럼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이 되겠다고는 차마 못하겠다.
당분간은 압구정, 광화문 지나며 가슴이 울렁일 수도 있겠다. 남은 가족 분들을 위해 간혹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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