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멕시코에서 한 달 살기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다
21살, 멕시코에서 한 달 살기
성적에 맞춰 대학을 입학한 후,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을 때였다. 전공도 의미 없이 골랐는데 선택할 과목은 너무 많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양과목까지 골라야 하자 혼란이 왔다. ‘열정도 의욕도 없는데 또 선택이라니.’ 나와 반대로 친구들은 확실한 꿈이 있었고 힘이 넘쳤다.
가까운 사람이 열정이 넘치면 그 열정은 자연스럽게 옮는다. 공허하게 다니던 학교에서 만나 한 달 동안 멕시코를 여행하며 동고동락했던, 활력이 넘쳤던 친구 ‘스페니쉬 써니’를 소개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조기유학을 다녀와 영어를 잘했던 그녀는 나에게 “영어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제2외국 어를 해야 해. 난 스페인어를 배울 거야.”라고 당차게 말했다. 그리고 정확히 6개월 뒤 멕시코를 간다며 비행기 표를 샀다.
당시에 나보다 몇 수 앞서 있는 그녀를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난 아직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데 제2외국어를 할 생각이라니. 난 그녀보다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 거야.’ 그녀의 당찬 확신은 내가 살던 세상과 확연 히 차이가 났다. 빠른 추진력과 실행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알고 싶었다. 당시에 그녀는 나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같이 갈래? 넌 여행하고 난 공부하고 좋잖아?”
그렇게 나의 첫 해외여행이자 멕시코에서 한 달 살기가 시작된다. 한국에서 멕시코시티까지 총 22시간. 우리는 손, 발이 팅팅 부은 상태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공부하기 위해 떠난 그녀는 살 집은커녕 며칠 동안 지낼 숙소만 달랑 구해서 출발했다. 거기에 함께 낀 난 그녀의 자신감이 단지 깡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도착 후 얼마 안 돼 우리는 길거리에서 카메라를 도둑맞았다.
그날 스페인어로 처음 욕을 구사했다. 멕시코 사람들이 말하길 ‘신발 안 벗기고 양말 벗긴다.’라고 할 만큼 소매치기는 일상이었다. 이 낯선 땅에서 동양 여자는 오직 우리 둘 뿐이었다. 지나갈 때마다 휘파람 부는 소리, 사진을 찍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좋은 분들도 많았다. 어떤 분은 나를 지켜줄 거라며 동그란 천사 그림을 선물해주었다.
당장 일주일 뒤부터는 살 집을 구해야 했다. 대책 없는 그녀와 난 무작정 그녀가 다닐 학교 근처로 찾아갔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전단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다 보니 핑크색 전단이 우리 눈에 들어왔다.
‘반값의 가격. 부촌에 있는. 커플을 초대합니다. 게이 하우스’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다. 나와 그녀는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둘 사이에는 잠깐 미묘한 스파크가 튀었다. 지금 무엇을 가릴 것인가. 무작정 전화를 걸고 집주인에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입주가 확정되었을 때 사실을 고백했다. “가난한 여행객과 학생일 뿐 커플은 아닙니다.” 다행히 집주인은 특별한 두 아시안을 흔쾌히 받아줬다. 담쟁이덩굴이 감겨 있는 2층 벽돌집이었다.
우리 방은 1층 주방을 넘어 복도 끝에 있었다. 집주인의 배려로 침대는 2개, 분홍색 타일과 장미꽃 문양으로 장식된 개인 화장실이 있었다. 그녀와 나는 폴짝폴짝 뛰며 손바닥을 치고 춤을 췄다. 어떻게 보면 그 집이 멕시코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우리는 4명의 남자들과 함께 살았다. 집주인 아저씨는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얼굴에 직업은 수의사였다. 그의 짝꿍은 귀여웠고 애교가 많았으며 잡지사 편집장이었다. 향수병으로 눈물을 흘리는 나를 위로해주고 달래 주는 마음이 따뜻한 남자였다. 2층에 사는 잘생긴 농촌 총각 이름은 미겔. 꿀 장사를 했으며 특유의 시골 출신답게 유쾌하고 정이 많았다.
‘스페니쉬 써니’는 서바이벌 언어의 달인이었다. 당시에 유창하지 않은 스페인어로 그들에게 말을 걸고 친구가 되었으며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다. 그들은 우리의 스페인어 선생님, 친구가 되었으며 놀러 갈 때 보디가드가 되어줬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중간중간에도 기사님께 무작정 말을 걸어 말도 안 되는 언어로 만담을 했다. 그녀를 보며 조기 유학을 한 어린 소녀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을지 눈에 그려졌다.
유학을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을 원망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디에 있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난 부모님 탓을 하며 현실을 회피하는 찌질이였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여행 중 어느 날 슈퍼에서 장을 보고 차비를 아낀다고 먼 거리를 걸었다. 한 번에 꼭 2주 치 장을 봐서 각자 양손에 4 봉지씩 들고 움직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왔다. 그 순간 손바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고 서러웠다. 그런 나를 그녀가 빤히 쳐다보더니 2 봉지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몸 힘든 건 괜찮아.”
나랑 동갑이면서 꼴에 멋있는 척을 했다. 6 봉지를 드는 그녀를 보며 진짜 힘이 세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어렸고 그녀는 나이에 맞지 않는 애늙은이였다.
그날 우리는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찌질했던 이때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무거운 짐을 들고 힘들어 우는 나도 맨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그녀도 서로 쪽팔린다고 했다. 그때 우리가 21살이었다. 21살, 찌질해도 괜찮은 나이였는데 우리만 몰랐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꿈을 보며 지냈다. 그녀는 멕시코에서 나는 한국에서 더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했다. 부딪히며 배우는 게 생활인 그녀를 보며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도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싶다. 나도 단단해지고 강해지고 싶다. 부딪히고 도전하며 살아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한 달 살기를 하고 난 뒤, 아보카도와 라임만 보면 한국은 비싸니 많이 먹어두라고 말했던 그녀가 생각난다. 남들보다 저렴한 가격에 아카풀코로 휴양을 즐기고 테킬라를 원 없이 마셨던 체력도 그립다. 블루베리 크림이 잔뜩 들어 있는 바삭한 추로스, 특히 한입에 꽉 물 때 그 맛과 냄새가 생각난다.
떠나는 날, 짐을 싸고 테킬라를 가득 채운 캐리어를 질질 끈 채 공항 검색대에 서 있었다. 공항 직원이 캐리어를 검사하자 그녀가 뒤에서 유창한 스페인어로 내 친구 건들지 말라고 소리쳤고 우리는 유쾌하게 마주보며 웃었다.
당찬 그녀는 지금 스페인어 전문 통역사다. 내가 떠난 뒤 6년을 넘게 멕시코에서 지낸 그녀는 현재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하고 도전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산림청, 임업 진흥원, 산림교육원, KOICA, IBBF, IOC, Anubis, 미슐랭 3 스타, 대사관, 삼성, LG 등 전 분야에서 활동하며 스페인어를 통역하는 사람 중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그녀 덕분에 나 역시 멕시코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눈으로 봤던 그녀의 가르침이 나에게 알려줬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당장 시작해라. 무엇이든 배우고 싶으면 빨리 도전해라. 도전해서 얻어진 배움이 가장 오래 내 것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출발했던 멕시코 여행이 나에게 촉매제가 된 것처럼 인생의 모든 경험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언젠가 돌아온다. 발로 뛰어 본 사람은 책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진짜 방법을 안다. 오직 나만이 가진 특별한 자격증이 되어 남들과 다른 특별한 비법이 생긴다.
책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에 실린 글입니다.
만약 당신이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언제나 기억하라.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꿈과 한 마리의 쥐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 월트 디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