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의 농담
상대방의 지각에 관대한 편이다. 내색 없이 기다려주면 상대방은 내게 미안함을 갖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배려를 하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인간관계에서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티 다 나는 영혼 없는 립서비스보다 훨씬 진정성 있는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기다리는 동안 밀린 카카오톡에 답장도 하고,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된다. 이후 다른 약속이 예정되어 있어서 나중에 자리를 떠야할 때도 먼저 끊고 일어남에 미안할 필요가 없으니 좋다. 지각에 관대한 이유는 이런 생각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스스로부터 지각이 잦은 편인 탓도 있다.
아는 사람들은 아는 문제이지만 지각이 고질병 수준이다.
학창시절에도 큰 말썽을 부리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지각 횟수는 많은 편이었다. 늘상 학주(학생주임선생님)에 걸렸고 화단에 담배꽁초들을 줍고 들어가기 일쑤였다. 꽁초를 줍고 있노라면 너무 많이 나와서 학생들은 담배를 못 피우게 되어 있는데, 이걸 누가 다 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설령 학생들이 폈다고 쳐도 이렇게 많은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그때가 짜증 나서 지금까지 비흡연자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로 나와서도 지각이 별로 고쳐지지 않았다. 직장 생활 같은 건 어떻게 했냐고? 참 다행인 것이 직장에 다닐 때는 근무 매뉴얼이 30분 일찍 도착해 있는 거여서 20분 전이나 15분 전에 도착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작가가 되어서는 작업 공간에서 글을 쓰면 글감이 막 떠오르지 않아서 멍 때리며 긴 예열시간(?)을 보내는데, 그러다 삘 받아서(?) 확 쓰게 되면 이미 밖에 나가야 할 시간임에도 글을 멈추지 않고 두드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가 하면 전화를 나누거나 바로 앞의 약속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도 먼저 끊고 일어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 행동이 어쩐지 결례 같아서인데, 그로 인해 다른 결례를 하고 마는 우스운 꼴이 연출되곤 했다.
자랑은 아닌데, 어제도 지각을 했다. 회의 시간에 지각을 했더니 다들 일제히 왜 늦었냐고 묻는다. 내가 말했다.
“예쁜 아내가 함께 사는 것도 아닌데, 결혼하고 나서는 어쩌죠? 걱정입니다. 제 성격 감당하며 살고 있을 미래의 아내도 걱정이네요. 아 진짜 어쩌지?”
다행하게도 평소 성격 까탈스러운 거 아는 지인들이 자학 개그에 “맞아 인정ㅋㅋㅋ”이라며 웃고 넘어갔다.
사실 이 대사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지각이 잦아 비판받았을 때 말한 야릇한(?) 농담을 응용한 거다.
당신도 나처럼 예쁜 아내와 살고 있으면 일찍 못 일어날 거요.
- 윈스턴 처칠(정치가)
많은 경우 재치는 단점을 극복한다. 강연장에서 종종 사람들 앞에서 웃기려면 어떡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강연장에서 웃기자고 하는 말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의문의 1패이기는 한데, 이럴 땐 "평소 전공이 남 웃기는 거 말고 뼈 저격에 가까워서 난감한 질문"이라며 웃고 넘어가는 편이다.그런 건 진짜 웃긴 사람들에게 듣는 게 좋다.
하지만 친구 중에 말주변이 없어서 고민인 사람이 있다면 대답을 하는데,(그래도 평소 사람들이 심심해하지는 않는 편이니까) 개그 프로 보는 거보다 토론 방송이나 국회 방송 보라고 권한다.
토론 방송에서는 사회 현안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토론자의 재치를 배울 수 있어 일석이조다. 요즘은 이런 분야가 예능화 된 경우도 많아서 접근이 그리 불편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국회 방송도 정치가 개그라고 조소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연설이나 토론 등으로 말에는 도가 튼 그 사람들이 무거운 상황에서 벌이는 재치는 드물게 나오더라도 필히 배워둘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라. 개그 프로에서 나오는 유행어들이 다 '무대용 개그'인데, 그걸 모르고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쓴다고 하면, 그 썰렁할 분위기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일단 나는 없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