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에 등장하는 연애스토리는 그렇다.
집착 연애라거나. 정신적 외도의 승리라거나. 에로스라거나. 너무나 현실 절절한 리얼 찌질연애라거나.
그런저런 드라마를 섭렵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 하나가 몽글하게 솟았다.
'내가 하고 싶은 연애는 어떤 모양일까?'
'어떤 색깔을 띠고 있을까?'
나는, 어떤 연애를 하고 싶을까.
백마 탄 왕자님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아하... 비현실적이어라.) 패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비주얼 끝내주고 머리 명석하고 츤데레, 혹은 마초 내음 풀풀 풍기는 재벌 3세쯤... (뭔가... 허무맹랑하다.) 패스.
원래 알고 지내던 인물들과의... (지금까지 그랬었다. 자만추를 가장한 주변 로맨스) 패스.
그러다 문득 아주 오래 전 기억이 하나 톡- 뇌리에서 터져올랐다.
열여덟 여고생 그 시절이.
풋풋했던 그때의 기억이.
"우리 반에 15번 버스 타고 다니는 사람이 누구야??"
쉬는 시간, 분주했던 교실 안에 일순간 정적이 일었다. 정적도 잠시, 호기심 많은 여고생들은, "누구야?", "15번?", "갑자기 무슨 일인데?" 조잘거리며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반짝이며 15번 버스를 타고 다니는 '요주의 인물'을 알아내기 위해 요란히도 시선들을 굴려댔다.
읽던 책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말끄러미 질문을 던진 친구를 쳐다보았다.
"15번, 나 그거 타고 다니는데. 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질문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너였어?!"
무언가 대단히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잔망스럽게 반응하는 그 아이를 보며 영문 모를 일이라는 듯, 다시 시선을 읽던 책으로 내리까는데.
"학교 게시판에 15번 버스의 그녀를 찾는대!"
나는 내리깔던 시선을 거두고 질문자를 뚱하게 쳐다보았다.
"그게 누군데? 그리고, 찾는 사람이 나 맞아? 확실해?"
15번 버스를 타고 다니는 우리 학교 학생이 한둘도 아니고.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가로젓는데, 질문자의 말이 그랬다.
우리 학교 바로 밑에 있는 남고의 학생이 '15번 버스의 그녀'를 좋아한다고. (이때부터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별명은 15번 버스의 그녀가 되었다.)
15번 버스, 나,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남자애.
<<15번 버스의 그녀를 좋아합니다>>
저는 00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남학생입니다.
매일 아침, 15번 버스 맨 끝 줄에 타고 있는 00학교의 그녀를 본 건 몇 달 전입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00학교 교복을 입은 그 여학생은 특히 눈이 참 예뻤습니다. 15번 버스를 처음 탔던 날. 그 예쁜 눈과 잠깐 눈을 마주쳤던 것 같은데.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한순간 좋아져버렸던 것은.
저는 그날부터 매일 같은 시간, 15번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
내가 버스에 타면 맨 끝 줄에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습니다. 어떤 날은 같이 버스를 탄 친구와 재잘재잘 웃는 모습이었고, 어떤 날은 피곤에 지쳐 잠이 든 모습이었고, 어떤 날은 이어폰을 꽂은 채 창밖을 내다보던 모습이었고.
저는 매일, 그런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내리곤 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이런 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 점점 커져가는 마음에 그녀에게 오늘은 꼭 말을 해야지, 해야지... 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오늘도 그저 그녀의 곁에 가만히 앉았다가 내리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교복을 보고 어느 학교에 다니는 것인지만 알고, 그 외에 그녀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그러다가 그녀의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보게 되었는데, 게시판에 반마다 걸린 단체 사진을 보고 그녀를 찾게 되었습니다. 00학교 00반 단체사진 끝에서 두 번째 줄, 하얀색 머리띠를 하고 있는 그녀가 바로 제가 찾는 그 사람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남학생이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렸다고 그녀가 싫어 할까요...?
이기적이라고 해도... 꼭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직접 나서서 말하지 못하는 용기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입니다."
게시글을 읽은 다음날. 나는 똑같이 15번 버스를 탔고 늘 앉던 자리에 앉아 게시글을 쓴 주인을 은근히 찾기 시작했다. 정류장을 하나 둘 지나고, 내 옆에 앉은 사람들도 하나 둘 바뀌었다. 그리고 2-3번째쯤 정류장이 더 지났을까. 키가 크고 조금 앳된 얼굴의, 00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애가 버스에 오르는 게 보였다. 남자애는 버스에 타자마자 내 쪽을 제일 먼저 쳐다봤는데,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살짝 내리깔더니 무심하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학교 게시판에 그런 고백 글까지 쓸 수 있는 정도라면, 오늘 내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다음 버스정류장을 지날 때까지 이어폰을 귀에 꽂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에게서는 아무런 액션이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가방에서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던 기억.
신기한 건, 시간이 아주 오래된 일이었음에도 그때 그 남자애가 썼던 게시글이라던가 버스 안에서의 상황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여전히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거였다.
살풋 웃음이 배어나왔다.
나한테, 이런 예쁜 기억이 있었구나 싶은 안도의 웃음이랄까.
그때 그 남자애도 지금쯤이면 참 많이도 변했겠지. 평범하게 한 가정을 이룬 가장일수도, 혹은 자신의 꿈을 열심히 하루하루 이루며 살 수도, 또는 누군가를 또 열렬하게 좋아하고 있을지도.
그리고 나 역시도.
그 시절 나를 첫사랑이라 말하던, 그저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미소 짓던, 내가 어떤 형태의 사람이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따듯하게 온기를 전하던.
내게도 존재했던 그런 예쁜 사랑은, 지지고 볶고 진저리를 치는 연애시절에 묻혀버렸다. 아니, 묻어버렸다. 정확히는 내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그 시절 15번 버스의 그녀는, 지금도 이따금 15번 버스를 탈 때가 있다. 그러면 까마득히 먼 옛날의 그때가 떠올라 풋- 하고 옅은 미소가 그려지기도 하면서. 그리곤 그때의 자리에 올라 앉아 열여덟, 15번 버스를 탄, 어떤 남자애의 첫사랑이던, 그 여자애의 한 때를 떠올려 본다.
그렇게, 예쁜 시절에, 특히 눈이 예뻤던 여자애를 아주 많이 좋아해줬던, 마음이 참 따듯했던 남자애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있잖아.
나는 아직도 가끔 말이야. 나를 아주 많이많이 좋아해줬던 너를 기억해.
삶이 가끔 지치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
너와의 짧았던 그날들이 내 등을 도닥여주고
차가워진 피를 36.5도의 온기로 데워주기도 하거든.
예쁜 추억, 고운 기억을 내게 남겨주어서
정말,
정말,
고마워.
안녕,
나의, 예쁜 남자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