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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Jan 24. 2024

#3. 그 계절, 우린 사랑했을까

- 지호의 이야기 3

벚나무에 꽃잎이 지고, 어느새 녹음이 우거지는 계절로 바뀌었다. 그동안 지호와 선우의 관계도 꼭 그만큼 깊어져 있었다. 서울과 무오리를 오가며. 인턴 생활을 하는 선우를 위해, 주로 지호가 서울로 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날도 그랬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 목소리 한번 듣기도 어려운 선우를 보기 위해 지호는 선우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디리릭- 도어록이 부드럽게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현관으로 들어선 지호. 그녀가 이 집에 온 건 일주일 만이었다. 변함이 없는 집을 보자 옅은 한숨이 새나왔다. 도대체 집에 들어오기는 하는 걸까. 지호가 마지막으로 손을 댄 머크컵이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컵은 좀 치우지...“


머그잔을 싱크대에 두고 집 안을 둘러보니 선우의 집 안은 어쩐지 냉한 기운이 느껴졌다. 여름 기운이 물씬 올라오는 날인데, 사람 사는 온기라고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지호는 통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여름의 향기가 기다렸다는 듯 한가득 몰려들어 냉한 집 안을 따뜻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열고 선우에게 톡메시지를 보내는 지호.


[선우 씨 좋아하는 토마토 김치찌개 해둘게.]


메시지 전송 후 핸드폰을 다시 바지 뒷주머니에 꽂은 지호가 창밖에 넓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본다. 막 피기 시작한 여름 들꽃 같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잔잔하게 피어올랐다.

마트에 가서 잘 익은 완숙 토마토를 골라 카트에 담고, 반찬 가게에서 잘 익은 포기 김치를 산다. 그리고 세탁소에 들러 맡겨둔 선우의 셔츠를 찾아 곧장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해가 지고 식탁 위에 밥상이 차려지면 선우가 돌아온다. 마주앉아 그리웠던 얼굴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저녁을 나누는 일상. 어쩐지 신혼 같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이 남자랑 정말 미래를 같이 걸을 수 있을까 맥락없는 생각에 픽, 혼자 웃어버리곤 앞에 있는 물잔을 들었을 때였다.


"같이, 살까 우리?"


켁켁. 식도를 타고 흐르던 물이 탁 걸렸다.


"뭐...?"

"왔다 갔다 힘들잖아, 지호 씨. 연애하자면서 정작 얼굴 한번 보여주는 게 어려우니까.“

“동거..를 하자는 말이야?”

“아무래도 같이 사는 건 좀.. 그렇, 겠지?”

“그런 것보다...”

“당장 대답 안 해도 돼. 한번 생각은 해보라는 거니까. 욕심이겠지만. 난, 내 옆에 지호 씨가 있어줬으면 좋겠어서.“


선우와 일상을 공유하는 삶.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오늘도 내내 그 생각으로 이유 없는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으니까. 그런데 막상 선우의 입에서 ’같이 살자‘는 말을 듣고 보니 어떨떨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무섭기도 하고. 그 순간 조금 전 남자가 했던 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지호는 제 앞에서 자신이 해준 밥을 먹고 있는 선우를  말끄러미 바라봤다.

이 남자랑 떨어지고 싶지 않다. 계속 함께 하고 싶다. 옆에 머물고 싶다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가져본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마음을 먹기까지가 힘들지, 한번 먹은 마음은 일사분란하게 지호를 움직이게 했다. 옷가지와 몇몇 책을 싸고 보니 별다를 짐이 없었다. 단출한 짐을 선우네 집으로 옮긴 것이 이사의 전부였으므로.

이제 여기가 내 집이구나. 짐 정리를 마치고 둘이 살 공간을 둘러보는데 마음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설렘, 그리고 왠지 모를 두려움. 그동안 몇 번이나 이 집에 왔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느껴졌다. 그런 지호를 가만히 뒤에서 안는 선우.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

“우리, 집...?”

“응. 지호 씨랑 나랑 둘이 살아갈 집. 서로 다르게 살아서, 한 공간에 있다보면 부딪히기도 하고 서운할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린 잘해낼 거라고 믿어.”

“치- 그걸 선우 씨가 어떻게 알아”

“피- 내가 그러기로 결정했으니까, 지호 씨랑”


까르르. 선우가 지호의 옆구리에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그만해~”

“대답해봐. 지호 씨도 그럴 거지?”

“뭘?”


또 다시 까르륵.


“잘해낼 거란 거. 무슨 일이 있어도.”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선호의 눈에 올곧게 시선을  맞춘 지호가 말했다.


“응. 잘해낼 거야, 우린. 나도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두 사람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선우와 함께 서울 생활을 한 지 여름을 지나 가을 그리고 겨울. 어느덧 삼계절이 흘러 다시 벚꽃의 계절로 돌아와 있었다.

선우와의 일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순하게 흘러갔다. 이렇다 할 말다툼 한번 하지 않았고 -사실 선우의 인턴 생활은 그야말로 ‘헉’ 소리가 나올 만큼 살인적인 일상이었다. 선우가 근무하는 대학병원에서 오피스텔까지는 10분 남짓의 거리였지만, 대체로 그의 얼굴을 볼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에 잠깐이었고 그마저도 호출이 오면 먹던 밥 숟가락을 놓아야 했기에, 감정소모 전은 사치였다.- 대체로 평화롭고 유유했다.

이제는 일상보다 삶의 한 부분이 된 것처럼. 파트타임 학원 강사 일을 마치면 퇴근길에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선우가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에 들러 마카롱을 산 후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느리게 걷는 길.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사이사이로 살랑 봄바람이 스며들었다. 갑작스런 바람 기운에 사사삭- 벚꽃잎들이 몸 비비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지호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가만가만 내려 앉았다.

작년 이맘 때였지. 태선우를 만난 게. 피식, 지호의 입매가 곱게 휘어졌다.

언젠가 선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말야. 나 퇴원하기 전 날. 왜 갑자기 번호 달라고 그랬어?”

“놓치면 후회할 거 같아서.”


고민 없이 선호가 즉답을 했다.


“나랑 말도 안 해봤고, 맨날 드레싱만 하고 갔으면서. 더군다나 맨날 환자복 차림으로 누워 있는데 뭐가 예쁘다고. 설마, 그런 취향이야?“


선우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선우를 빤히 보는 지호. 선우의 눈에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이래서 빠진 건가 싶어 쿡쿡 웃음이 터졌다.


“아 뭐야~ 사람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알았어. 말하께. (큼큼) 퇴원 하루 전에 지호 씨가 간호사랑 하는 얘길 우연히 들었거든.”

“간호사랑? 무슨 말을 했는데?”


선호가 손을 뻗어 지호의 볼을 가만히 쓸었다.


“태선우 선생님,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하면서. 엄청 긴장했는지 두 손을 맞잡았다가 놨다가. 간호사가 잠깐 생각해보더니 없는 거 같다고 하더라고. 그 말에 얼마나 안도를 하던지. 방방 뛰면서  다시 병실로 가더라.“


순간, 열이 훅 오른 지호가 빠르게 지호의 손을 떼내며 아랫 입술을 꾸욱 말아물다 말고,


“뭐야. 선우 씨는 관심도 없는데 내가 관심 있어 하니까 번호 달라고 한 거네?”

“아-니. 그거 알아? 내가 드레싱을 하러 지호 씨 침대 쪽으로 다가가잖아. 그럼 안에서 갑자기 후다닥 엄청 분주한 소리가 막 들려. 그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표정 관리 한다고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맨날 눈 꾹 감고 고개 돌리고 있는 것도 괜히 예뻐보이고 그랬어.“

“치- 순 엉터리, 돌팔이 의사!”


지호의 말에 마주 본 두 얼굴이 웃음을 터뜨리던 기억. 기분 좋은 회상에 젖어 있다 보니 어느새 오피스텔 횡단보도 앞에 선 지호. 그때였다. 지잉- 지호의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갑자기 동기가 급한 일이 생겼다고 당직을 바꿔달라고 해서. 우리 지호 씨, 저녁 혼자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메시지를 본 지호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토독토독, 핸드폰 패드를 터치하며 글자를 입력했다.


[내 걱정 말고, 선우 씨 밥 잘 챙겨요.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이런 게 사랑인 걸까. 선우를 만나기 전, 몇 번인가 만나던 사람이 있기는 했는데. 그건 연애가 아니었나보다. 그 남자 얼굴도 뿌옇게 흐려진 걸 보니.

보행자 신호가 바뀌고. 지호의 눈에 선우와 종종 밤 산책 길에 들르던 카페가 보였다. 걸었더니 목도 마르고 커피나 한 잔 사갈까? 싱그러운 마음으로 카페 앞으로 다가가던 지호의 발걸음이 순간 우뚝, 멈췄다. 통유리 창 너머에, 낯선 여자와 마주한 선우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 계절, 자신에게 보이던 환한 얼굴과 눈빛을 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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