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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Jan 26. 2024

#4. 내가 버리는 거야, 너

- 지호의 이야기 4

선우의 표정이 낯설었다. 그런 얼굴은 나한테만 보이는 게 아니었나?, 같이 있던 여자는 누구지?, 아니야‥ 동료 의사겠지,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터벅터벅 집으로 걷는 내내 머릿속에 떠다니는 물음표들을 지워내며, 지호는 담백하게 결론을 내렸다. 선우가 돌아오면 물어보자. 늘 그랬듯 선우는 말끔한 대답을 들려줄 거니까.

복닥거리던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설 때였다. 현관 앞에 고급스러운 여자 구두 한 켤레가 놓인 게 보였다. 누가 왔나? 누구지? 올 사람이없는데. 6개월이 넘게 선우와 함께 살면서 이 집에 누가 왔던 적이 있었던가.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흔한 동료 의사 한 번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은 선우였다.

흐트러짐 없이, 명품 매장에 진열된 것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구두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집안에서 현관 쪽으로 –정확히는 지호가 서 있는- 기품이 묻어나는 중년의 여자가 나왔다.     


“누구...세요...?”     


그녀가 누군지 알 것만 같은 느낌에 잘게 떨려오는 손끝을 말아쥐며 지호가 물었다.     


“서지호 씨? 나 태선우 엄마에요.”      

선우의 엄마라고? 지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선우의 엄마가 왜‥ 그보다 선우는 알고 있는 걸까? 선우에게 엄마가 올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혹시 내가 잊은 걸까? 아니면 미처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한 걸까? 정리가 됐던 머릿속에 또 다시 물음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선우의 엄마라고 소개한 여자는 그녀의 하얀 팔목을 감고 있는 메탈 시계를 우아하게 흔들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건 아니죠? 할 얘기가, 있을 거 같은데요. 우리.”     


생각의 끝을 달리던 지호의 정신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한 탓인지 손바닥에서 은근한 땀이 배어 나왔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펴서 바지 옆단에 문지르며 천천히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는 지호. 고급스러운 구두 옆에 놓인 자신의 운동화가 어쩐지 초라해 보여 심장께가 뻐근해져 왔다.

나비가 꽃잎에 내려앉듯, 거실 소파에 사뿐히 앉는 미현(선우모). 그 몸짓이 하도 우아해서 지호는 잠시 호흡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앉아요.”     


미현의 말에 멈췄던 지호의 호흡이 돌아왔다. 카페에 낯선 여자와 마주앉아 있는 선우,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선우의 엄마까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듯 지호는 짧게 숨을 가다듬고 차분히 대꾸했다.      


“차, 드시겠어요?”

“아뇨. 금방 일어날 거라.”     


쿵쿵쿵, 지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자꾸만 주저앉는 무릎을 곧게 펴며, 미현의 앞으로 앉는 지호. 그녀를 바라보는 미현의 눈매가 깊어졌다.      

“서로 오래 마주앉아 있어봤자 감정만 다칠 것 같고. 본론만 간단히 할게요. 우리 선우, 지금 맞선 보고 있을 텐데. 서지호 씨는, 알고 있나요? ”

“!!”     


선우가 맞선을 본다고? 지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짐작 하겠지만- 선우랑 그만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러 온 거예요.”     


고저 없이 맑은 톤으로 입술을 움직이는 미현의 모습은, 헤어지라는 말이 아니라 흡사 다정한 밀어를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했다. 정리...라고?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과 헤어지라고.

지호는 자신 앞에 처한 상황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해하려 애를 써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죄송하지만, 전화 한 통만 해도 될까요?”     


미현은 그러라는 듯 가볍게 끄덕였다. 지호는 자신의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열었다. ‘선우’라는 두 글자에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지만 힘주어 그 이름을 길게 터치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핸드폰 너머로 “지호 씨!” 자신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는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호는 잠시 미현의 눈을 응시했다. 시선을 그대로 둔 채로,     


“지금 당장 집으로 좀 와줄래? 당신 어머니, 여기 와 계셔. 태선우 씨.”     


흐트러지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의 아들과 통화하는 지호를 보면서도 미현은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마치 그리할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지호가 핸드폰을 다시 옆자리에 얌전히 내려놓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부터 말을 해야 할까. 지호는 긴장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사실 제가 선우 씨의 집안 이야기라던가, 주변 이야기를 들은 게 별로 없어요.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의사고 어머니는 굉장히 사려 깊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것 정도요.”     


자신을 향해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가는 지호를 향해 미현이 슬쩍 끄덕였다. 더 이야기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형제 관계는 위에 형이 한 명 있다는 거, 형은 의사가 아니라 자기 사업을 하는 게 꿈이라서 선우 씨가 의사가 되었다는 거, 때가 되면 집에 함께 인사하러 가자고, 결혼을 할 사람으로 소개시키겠...”     


문장을 채 끝맺지 못하고 지호의 말이 뚝 끊겼다. 낯선 여자에게, 사랑하는 남자의 엄마라는 이유로, 내가 지금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어야 하는 건지. 말하고 보니 정작 선우에 대해 아는 거라곤 왜 이렇게 변변치 않은 것들뿐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호의 망막에 맺혔던 미현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절대. 지호가 울지 않으려 턱을 지끈 물 때였다. 현관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엄마!!”     


날 선 선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물 위의 백조가 목을 한껏 쳐올리는 것 같은 우아한 몸놀림으로 선우에게 시선을 맞추는 미현.     


“맞선은, 잘 봤니?”

“!!!”     


꼭 말아쥔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두고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지호 쪽으로 선우가 급하게 시선을 틀었다.     


“약속, 이게 아니었잖아요.”

“네가 엄마한테 한 약속이 이게 아니었지. 잊었니? 맞선 나가기 전까지였어, 서지호 씨와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그래서 네가 밖에서 이러고 있는 거 다 알았어도 봐준 거고.”

“엄마!!”     


선우도 이런 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지호는 날카롭게 할퀴는 듯한 사나운 목소리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작은 움직임조차 없던 지호가 선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설명 좀 해줘, 선우 씨. 어머니와 풀어야 할 건 나중에 하고.”     


지호의 눈을 본 선우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선우는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지호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선우의 본가에서는 뒷조사를 통해 이미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 지금 선우가 일하고 있는 대학병원의 병원장이 선우의 아버지, 재단의 이사장이 선우의 어머니라는 것. 둘의 관계가 들통났을 때부터 선우에게 맞선이라는 행선지가 정해져 있었으며 맞선 전까지 지호와의 관계를 정리할 것을 강요 받았다는 것. 그리고 선우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과 맞선은 제 부모로부터 지호를 지키기 위한 눈속임이었다는 것.

선우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지호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였다. 꾹 다물렸던 지호의 입술이 열렸다.


"헤어질게요, 태선우랑“


어떤 말에도 동요하지 않던 미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그 말, 믿어도 되는 건가요?”

“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칼에 대답을 하는 지호를 보며 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지호!!”


그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지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을 때였다. 화답하듯 옅은 미소를 머금은 미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아들은 아니지만 서지호 씨는 믿음이 가네요. 믿어 보죠, 그 말”


미현이 돌아설 때였다.


“태선우 씨 어머니의 헤어지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결정한 건 아닙니다.“


지호의 차가운 음성에 미현이 몸을 틀었다.


“엄마 아빠 이혼 후에 오늘은 재혼한 엄마 집, 또 내일은 다른 여자랑 뒹구는 아빠 집. 이렇게 떠돌며 눈칫밥을 먹고 자라서요 제가."


더는 듣기 힘들다는 듯 선우가 지호를 일으켜 세웠다.


“그만해 서지호.“


지호가 선우의 손을 슬며시 뿌리쳤다.


“처음부터 축복 받지도 못할 결혼 따위는 안 하고 싶습니다. 제 인생을 평생, 굽신 거리면서 눈칫밥이나 먹고 싶진 않아서요."     


피식, 미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대대로 의사 명문가... 사실 댁의 아드님이요, 이 명문가 명패 떼고, 의사 딱지 떼고 나면 참 별 볼 일 없는 남자에요. 어디 내놓아도 제가 아깝다, 이런 말입니다.“

"서지호, 미쳤어!? 넌 뭐가 이렇게 쉬운 건데? 그만하고 나가, 나가서 나랑 얘기해!"


선우가 우악스럽게 지호의 손을 그러쥐었다. 자신의 손목을 지호가 서늘하게 내려봤다.


"나 그 어느 때보다도 말짱해. 그러니까 태선우, 잘난 네 부모님 설득해서 결혼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거 없어. 내가 버리는 거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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