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너의 세계에,

- 지호와 선우의 이야기 9

by 장해주

"여기까지가 끝일 정도로 뭐 대단한 걸 한번 해보긴 했어?"


선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호가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리며 앞에 있는 소주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쪼로록. 빈 술 잔에 말간 액체를 채웠다.


"이 잔도, 비워야 채워지는 거거든. 근데, 넌 뭘 끝낼 정도로 채워본 적도, 비워본 적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지워야 할 때 못 지우고, 지우지 말아야 할 때 지워버리는 바보 같은 행동만 하는 거겠지."


지호의 하얀 손이 말간 액체를 담은 잔을 들어 입속으로 털었다. 꼴각.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간 이 액체의 맛이 꼭 자신과 태선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조 섞인 픽.


“싸장! 계산 내일 할게!”

무감한 얼굴로 답하는 이영.


“그러던지.”


비틀. 중심을 잃은 그녀가 선우 쪽으로 쓰러지려는 찰나, 터억- 재빨리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는 지호였다. 절대로 그쪽으로는 쓰러지지 않겠다는 결의가 애처롭게 보였다.

두 번 다시 꽃 피울 일은 없으리. 두 번 다시. 다시 한 번 다짐을 하는 지호가 아랫입술을 꾸욱 말았다.

"꺼져. 제발 좀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나 그냥 이렇게 살게 좀 내버려둬.. 부탁이야, 제발."


우는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마치 목련이 소멸하는 듯한 애처로운 얼굴로 지호가 돌아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선우에게서 멀어가던 그때였다.


"그만. 거기 서, 서지호"


선우의 낮은 음성에 일순, 비틀거리던 지호의 걸음이 툭 멈춰섰다. 여전히 그에게서 등 돌린 채로.


"그 자리에서 딱 한 걸음, 그 발 내딛는다면.."


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딛는다면? 그래서 뭐?' 그 채로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포기할게. 그 발 끝이 그대로 내려 닿는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울컥. 지호 안에서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명치께를 파고 들었다. 그렇게 돌아섰다. 태선우에게로.


"날 붙잡으려는 최선이 고작 이거야? 붙잡고 싶은 거면 조금 더 최선을, 아니! 태선우의 최고 정도는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지호는 죄 없는 아랫입술만 짓씹었다. 아팠다, 저 남자 때문에. 그러나 아프지 않고 싶었다. 저 남자로 인해.


"이게 태선우가 보여주는 최선 맞아? 이따위 말 같지도 않은 협박 따위를..."


지호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태선우 세계에 나는 없었던 거구나.”


선우의 입술 끝이 단단하게 물렸다. 지호가 물었다.


“내가 너랑 헤어지겠다고 돌아섰을 때, 물었잖아 나한테. 내가 너 사랑한 거 맞냐고. 이젠 내가 물어볼게. 너, 나 사랑했니?”

단단하게 물린 선우의 입술 끝이 애처롭게 떨렸다. 사랑했느냐고 물어오는 이 여자에게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지호야.. 나는..."


차마 끝을 맺지 못하고 끊겨버린 입술의 말이었다.


“네가 박선우건 태선우건, 서지호가 사랑한 사람은 내 눈앞에 앉아 있는 너야. 네가 박선우면, 태선우일 때 만났던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누구던 그게 왜 중요한 건데. 넌 내가 누가 됐거나 누구였거나 하면, 나 안 좋아했을 거야?"


선우가 빤히 지호의 얼굴을 응시했다.


“네가 진짜 찌질한 이유가 뭔 줄 알아? 아프고 고통스러운 거 싫어서, 대면하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 혹시라도 뭐 네 잘못이 아니다, 이런 말 듣고 싶었다면 난 안 해줄 거야. 어설픈 위로 안 해. 그냥 아플 만큼 아파. 죽을 만큼 아프라고!"


선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살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나는 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키우는 것도 힘들어. 살았으면, 이제 태선우 갈 길 가."


지호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다시 돌아설 때였다. 털썩. 지호 앞에 무릎이 꿇렸다.


"지금 보여줄 수 있는 내 최선이야. 지호야."


지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