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랑이 지나가면

- 지호와 선우의 이야기 10

by 장해주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이 지나가면

달칵. 카세트 안에서 테이프 한 면이 다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지금 우리의 관계도 이런 걸까. 마지막 노랫말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 지호는 일렁이는 눈가를 두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자신 앞에 애처롭게 꿇어앉아 있는 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제는 정말 모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선우가 없던 그 시절처럼. 선우를 몰랐을 그날처럼. 혹은 그 병원에서 그저 환자와 의사로 지나쳤더라면.


"선우 씨."


선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여전히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 좀 보라고 태선우 씨."


천천히 얼굴을 들고 지호를 바라보는 선우. 선우는 지호의 저 두 눈동자가 좋았다. 오롯이 자신만을 담고 있는, 저 세계에 선우 자신만이 가득하다는 만족감이.

서로를 담은 두 눈동자가, 두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픔을 지나고 고통만이 스산하던 수많은 시간이, 주고받는 눈빛 속에 천천히 녹아들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로는 서로를 알아봤다. 너도 나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한 형벌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서로의 상처의 무덤을 더듬고 끌어안아 마침내 피딱지로 엉겨붙은 상흔 덩어리를 떼어냈다.

지호는 망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의 얼굴에서, 왜 그 시절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나. 학교에서 같은 반 남자애가 짖궂은 장난을 쳤다. 하루종일 자신을 좋아한다며 졸졸 쫓아다니는 그애를 일부러 떨어뜨리느라 평소 잘 달리지도 않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다 퍽- 하고 자빠졌던 일. 그렇게 무릎이 깨져 피가 뚝뚝 흐르는 다리를 이끌고 절룩이면서 집으로 걸어가던 길. 그애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다치는 일이 없었을 거라는 억울함. 내일 학교에서 보면 잔뜩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이를 악물던 다짐. 이런저런 생각으로 씩씩대며 집으로 들어섰을 때가. 깨진 무릎에 호호 입바람을 불어가며 연고를 발라주던 할머니의 손길이. 그러면서 자신에게 가만가만 이야기를 건네던 할머니의 말소리가.


"지호야. 깨진 무릎은 이렇게 연고 바르면 나아. 할미가 매일 이렇게 소독해주고 연고 바르면 낫는다, 이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할머니의 말에 짜증이 섞인 말이 지호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할무니는 손녀딸이 다쳤는데 속상하지두 않어?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해?"


연고를 바른 무릎에 밴드까지 살뜰하게 붙인 할머니의 말은 이랬다.


"그냥 그렇다는 거야. 상처는 아무는 건데 자꾸 거기에 눈길 주고 손길 주고 보태지 말라는 얘기야."

"아 몰라! 할무니 짜증나!!"

"우리 손녀딸이 할미가 속상한 마음을 안 알아줘서 이렇게 삐뚜름 할까, 아니면 다친 게 그 친구 때문이 아닌 걸 아는데 자꾸 그 탓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걸까?"

"아! 말 시키지마아!! 할무니랑 말 안 해!!"


그런 손녀가 너무나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던 그 한 장면.

지호는 할머니의 그날의 말 뜻이 이제야 제대로 들렸다.

먼저 시선을 거둔 쪽은 지호였다. 지호는 천천히 선우 앞에 그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다시 시선을 맞췄다.


"있잖아. 나는 이제 당신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지치다 못해, 텅 비어버린 이런 얼굴은.. 당신이 아니야.."


선우가 우는 듯 아픈 듯 알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호에게 애써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이, 렇게?"


픽- 지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거 말고. 서로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지금 당신 이 미소처럼. 우리는 또 애쓰면서, 그렇게 삶을 살아갈 수 있어."


"너 없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또 다시 고개를 떨구는 선호의 얼굴을 지호가 자신의 두 손으로 붙잡았다.


"선우 씨. 우리 애쓰자. 죽을 만큼 아팠지만 봐봐. 우리 안 죽었어. 그렇게, 살자.. 응? 애쓰면서 살자. 가끔 서로가 너무나 그리워서 몸서리가 쳐질 때는 그냥 좀 외면도 하면서. 그냥 그렇게 애쓰면서 살자. 우리 사랑은.. 지나갔어. 그거 그냥 예쁘게 흐르게 두자."


선우의 두 눈에서 주르륵, 긴 물줄기가 떨어졌다. 지호는 말하는 내내 턱 끝이 떨려왔지만 이내 '악' 소리를 삼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같이 지낸 시간, 시절은 그림자 같은 게 아니야. 실제였어. 같이 마주보고 살결의 온기를 나누고. 이런 모든 것들이 내 삶에도, 선우 씨의 시간에도 새겨져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지..ㅎ..."


선우는 끝끝내 지호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혀끝에서만 뱅뱅 맴돌기만 할 뿐, 생애 단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그런 이름처럼. 지호를 부르고나면 정말 이제는 지나가버려야 할까봐. 선우는 지호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낼 수 없었다.

이런 선우를 보며 지호는 마음을 굳혔다. 이제는 정말 스쳐가야 한다고. 떠나가야 한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먼 기억이어야만 한다고. 지호는 자신을 달래는 듯, 선우에게 담담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넘어져서 무릎이 옴팡 깨진 적이 있었어. 연고를 발라주던 우리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하더라. 연고 바르면 낫는다고. 매일매일 소독해주고 연고 바르면 무릎은 낫는다고. 그러니까 상처에 자꾸 손길 주고 눈길 주고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지호가 단단한 눈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그때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거든? 근데.. 이제 알 것 같아. 우리 죽을 만큼 애쓰는 거, 그거 매일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서로의 기억 속 얼굴도 흐릿해질지 몰라. 내가 그 시절의 사건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럴 거야. 서로를 먼발치에서 보더라도, 그냥 그렇게 지나쳐 흐르는 때가 올 거야."